인정받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했던 선교지의 열매

신선한 능력 (by Jim Cymbala, ZPC, Jan. 1, 2001)


  국외 선교활동에 관심을 가지시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 7기 PMM 선교사 1차 교육당시 전해들은 선교지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말 뜨거운 감동의 물결이 선교사들의 가슴 속에 연결되어 또 다른 진한 감동의 이야기들이 계속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지켜보던 날 사울의 마음에 심겨진 그 어떤 느낌, 나중에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났던 그 느낌은 소중한 것이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아는가? 이로 인하여 로마제국 전역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생겼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를 신약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울의 글을 통하여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1921년에 스웨덴에서 살던 데이비드와 스비아 (David and Svea Flood) 선교사 부부가 두 살 베기 아들을 데리고 아프리카의 심장인 콩고의 벨기안 (Belgian)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에릭슨 부부(the Ericksons)를 만났으며 이 네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였다. 당시는 감성이 깊고 희생과 헌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때라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안정된 선교본부를 떠나 미지의 불모지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강하게 느꼈다.

  이것은 엄청난 믿음의 거보의 첫걸음이었다. 그들은 엔돌레라 (N'dolera)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추장이 그 마을의 신을 노엽게 할까봐 선교사들이 자기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이 두 부부는 마을에서 반마일 떨어진 비탈에 진흙으로 움막을 지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마을에 복음을 전할 길을 모색하였으나 허사였다. 단 하나의 접근은 한 주일에 두 번 그들에게 닭과 계란을 팔도록 허락을 받은 한 소년뿐이었다. 키가 142cm에 불과한 작은 여인 스비아 플러드는 결심하기를 그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아프리카인이 이 소년뿐이라면 그를 예수님께 인도해야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 여인은 그를 주님께 인도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다른 어떤 고무적인 일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말라리아가 퍼지면서 이 선교사 가족들을 차례로 괴롭혔다. 에릭슨 가족은 이정도의 고통이면 되지 않았는가 하고 선교본부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데이비드와 스비아는 엔돌레라 마을에 그냥 남아 그들의 일을 계속하였다.

  게다가 스비아는 이 와중에서 원주민의 황야 복판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산할 때가 다가오자 이 마을 추장은 마음이 좀 누그러졌는지 조산원을 보내어 그녀를 돕게 하였다. 자그마한 딸이 태어났고 그들은 이 아이를 아이나 (Aina)라고 불렀다. 

  그러나 분만의 수고가 그녀를 소진시켰고 스비아는 말라리아를 치루면서 벌써 쇠약해진 상태였다. 해산을 하는 동안 그녀는 기진맥진하게 되었고 17일을 견디다가 죽였다. 

  데이비드는 내심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급히 무덤을 파고 스물일곱 살 난 아내를 거기에 묻고 갓난아이를 데리고 선교본부로 내려왔다. 그의 피붙이 딸을 에릭슨 가족에게 부탁하면서 그는 울분을 터트렸다. “나는 스웨덴으로 가겠소. 난 아내를 잃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아이를 돌볼 수가 없을 것 같소.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했단 말이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부두를 향해 갔고 그는 선교사의 소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버렸다.

  그 후 8개월이 되지 않았는데 에릭슨 부부는 이해할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면서 며칠사이에 둘 다 죽었다. 이 불쌍한 아이는 몇몇 아프리카 선교사들에게 전전되면서 “악기” (Aggie)라는 스웨덴식 이름으로 불렸고 마침내 3살 되었을 때 미국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이 가족은 이 어린 아이를 무척 사랑하였고 그들이 아프리카로 되돌아가면 어떤 법적인 문제로 이 아이를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귀국하게 되었고 선교사의 봉사 대신에 목회사역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악기는 사우스다코타 (South Dakota)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젊은 여인으로 성장하였을 때 악기는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신학교 (North Central Bible College)에 다녔고 거기서 드웨이 허스트 (Dewey Hurst)라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였다. 여러 해가 지났고 허스트 부부는 성공적으로 목회사역을 계속하였다. 악기는 첫딸을 낳았고 다음에 아들을 낳았다. 그의 남편이 시애틀 지역의 기독교 대학 학장이 되었을 때 악기는 스칸디나비아 유산을 찾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다음 기사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