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월요일


바티칸 박물관

아침 일찍 바티칸 박물관을 향했다. 여덟 시 15분 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이 길었다. 바티칸 박물관을 안내하는 안내인의 첫 말은, “여러분은 지금 이태리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티칸에 오셨습니다”였다. 교황청은 이태리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국가임을 선언하는 말이었다. 이어서 말하기를 저는 여러분의 안내인이 아니라 담스팃 박사님에게 배우는 학생이라며, 담스팃 박사의 전문성을 인정했다. 엄청난 분량의 소장품은 세계의 어느 박물관보다도 많은 곳이다. 천주교회는 세속적인 예술과 교회의 예술로 연간 400만 명 이상을 끌어들이고 있다. 라파엘과 미켈란젤로의 그림으로 천주교회의 역사와 성경의 기사들을 해석해놓았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으로 천정과 벽이 채워진 시스틴 성당은 발디딜 틈없이 관람객으로 가득 찼다. 바로 이곳에서 1798년 2월, 자신의 교황즉위일을 기념하던 그 자리에서 비오 6세가 버티어 장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또 하나의 대쟁투의 역사 현장이다. 전면은 장식한 미켈란젤로의 걸작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죽으면 지옥으로 가거나 연옥으로 가서, 후손들의 신앙과 헌금에 따라 연옥을 벗어나 천국으로 간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예수 옆에는 마리아가 있었다. 천주교인이 아닌 여행 가이드들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해주는 모습을 보았다. 시스틴 성당의 천정에 그린 그림들 가운데 제일 먼저 그린 그림은 노아방주와 관련된 그림이며, 가장 나중에 그린 그림은 요나에 관한 그림이라고 한다. 부활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천주교회는 미술품을 통해서 비 천주교인들의 입으로 그들의 신앙을 전하고 있었다.

지난 번 방문할 때는 비오 6세의 이름으로 명명된 방에서 버티어 장군에게 포로가 되는 그림들을 보았었다. 1798년, 다니엘서 7장 25절과 계시록 13장 3절의 예언대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끝나는 해인 가 1798년, 정확하게 예언을 성취시키는 장면이었으나 이번에는 안내자가 다른 곳으로 이끌어 그 장면을 못 본 것이 아쉽다.


1260년의 역사를 끝나게 한 발의 총알

오후에는 코르시니 궁을 보았다. 코르시니 궁은 프랑스 대사(나폴레옹의 형, Joseph Bonaparte)의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1797년 12월에 뜻밖의 사고가 일어났다. 교황정부군과 이태리의 독립을 외치는 시위대 군중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교황정부군의 한 병사가 발포를 했다. 그 총알이 우연하게도 나폴레옹 황제의 형수의 여동생(Désirée Clary)의 약혼자였던 프랑스의 두포(Léonard Mathurin Duphot) 장군에게 맞아 숨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 황제는 격분하여 교황과의 모든 평화조약을 백지화하고 1798년 2월에 교황정부를 없애고 로마의 혁명공화정부를 세우기 위해 버티어 장군을 로마로 보냈다. 버티어 장군은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현장에서 나이 많은 교황 비오 6세를 체포했다. 그 총알이 일반 군중에게만 맞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작은 사건이 예언을 성취시키는 큰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곳

오후에는 라테란을 방문했다. 라테란 성당은 로마의 4대 성당들 가운데 첫 번째가는 성당으로 로마주교가 있는 곳으로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보다 우위에 있어, 천주교인들 사이에 모든 성당들의 어머니 성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태리의 독재자 베니토 뭇솔리니와 교황청을 대표한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이 1929년 2월 11일, 교황청의 영토를 돌려주고 교황의 주권을 인정해주는 라테란 조약의 현장이다. 계시록 13장 2절의 죽게 된 상처가 낫는 예언 성취의 현장이다.


사실이 아니어도 돌에 새겨놓으면

라테란 성당을 벗어나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침례를 받았다는 성 요한 침례탕 교회를 방문했다. 교회 안에는 콘스탄틴 황제와 관련된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사실 콘스탄틴이 침례를 받은 곳은 이곳이 아니라 그가 태어나고 죽은 니코메디아이다. 콘스탄틴은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하지만 죽기 바로 전에 침례를 받았다. 라테란 성당과 침례탕 사이에 있는 광장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오벨리스크(230톤, 32.18m, 기단 포함 45.7m)가 세워져 있다.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가 건립한 것이다.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로마로 옮겨져 막시무스 경기장에 자리 잡았으며, 1587년 식스토 5세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바로 그 오벨리스크의 기단에 콘스탄틴 황제게 교황 실베스터에게 침례를 받았다고 명각해놓았다. 역사는 잊혀져 버리고 사실이 아닌 내용을 대리석에 새겨놓았으니 거짓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그렇게 믿지 않겠는가!


라테란 궁 바로 앞에 있는, 마틴 루터가 무릎으로 올라가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각성을 경험한 빌라도의 층계를 방문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드리며 무릎을 꿇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콘스탄틴의 증여가 그림으로 남아있는 곳

다음에 간 곳은 실베스터 교회였다. 아주 오래되고 초라한 그리고 다른 모든 성당들은 보수가 되어있는 데 전혀 보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허름한 교회. 하지만 중요성은 결코 적지 않다.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666과 관련된 VICARIUS FILLL DEI를 처음 사용한 콘스탄틴의 증여에 관한 그림이 있는 유일한 곳으로 그 중요성이 다른 곳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곳이다.


천국에서 쫓겨나는 개혁자들

오늘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예수교회. 전 세계의 제수이트의 총본산이다. 예수교회 안에 로욜라 채플에는 피에트로 게 그로스가 조각한 이교에 대한 믿음의 승리라는 조각상이 있다. 마리아가 왼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오른 손에는 불을 들고 발로는 두 사람을 짓밟고 있는 조각이다. 한 사람은 칼빈이고 다른 한 사람은 루터였다. 그들 밑에는 그들을 저술한 책들이 깔려 있었다. 왼쪽에는 책을 찢고 있는 큐피드가 있어 사진을 확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책의 저자가 쯔윙글리였다.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