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을 보내는 마지막 안식일 오후 세시, 영남합회의 김종화 목사가 담임하는 부산동래교회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선교 110주년과 순교자 배경수 목사의 순교를 기념하는 두 개의 기념비 제막식이었다. 1904년 6월 11일 일본 고베의 누노비키 폭포에서 침례를 받은 이응현은 하와이로 떠나고, 손흥조는 한국으로 돌아와 6월 15일 동래에 발을 디뎠다.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30여명의 신자들을 모아놓았다. 그가 귀국하는 선실 안에서 하와이에서 귀국하는 임기반씨를 만나 안식일 기별을 전했다. 임기반은 진남포로 올라가 30여 명의 안식일 준수자들을 모아놓고 구니야 히데 목사를 초청했다. 쿠니야 히데는 진남포로 가는 길에 8월 4일 부산 동래를 방문하여 손흥조씨를 만났다. 이런 모든 일들이 최초의 한국인 재림교인들이 침례를 받고 두 달 안에 이루어졌다. 한국에 재림기별을 첫발을 내디딘지 110주년을 기념하며 동시에 배경수 목사가 순교한지 7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한의사였던 배경수 목사는 평양에서 장로교회 계통의 숭실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도 지역에서 순회목사를 하다가 재림교회의 문서전도인 한효선씨를 만나 영원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김항모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1923년에 부산동래에 와서 2년간 문서전도를 하며 교회를 도왔다. 이후에 전라남도 광양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네 곳에 교회를 개척하며 일본에서 정규 목회자로 채용되었다. 일본에서 복음을 수입한지 29년 만에 일본으로 복음을 역수출한 셈이다.


1943년 2차 대전에 치열했을 때, 재림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성결교회와 재림교회가 문을 닫게 되며 42명의 재림교인들이 체포되었으며, 배경수 목사는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네 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일본인들도 모진 고문을 당하며 순교하는 마당에 한국인인 배경수 목사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고문을 당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모진 고문으로 사경에 이른 배경수 목사를 1944년 8월에 감옥에서 내보냈다. 배 목사는 부산동래로 돌아와 1945년 5월 23일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주님 품안에 잠들었다.


동래교회 110주년 기념식과 배경수 목사 순교 기념비 제막식을 위해 서일본 합회장 야마지 목사와 고베교회의 담임 목사와 수석장로, 그리고 고베교회에서 출석하는 김나희 성도가 통역으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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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배경수 목사의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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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침례를 베푼 구니야 히데 목사의 생애를 소개하는 고베교회 무라타니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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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수 목사의 유가족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김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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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교회에 감사패를 전달하는 서일본합회장 야마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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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에 축사를 하는 북아태지회 총무 이나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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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본합회장 야마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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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합회 총무 남시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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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합회 평신도 실업인 협회장 김광호 장로의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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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온 지도자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