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받을 표준에 등급이 있을까?

영적 지도자와 평신도 사이에 구원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같은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는 두 사이에 구원의 표준이 다를 것이라는 시각을 펼치는 집단이 있어 왔다.

예컨대, 교회가 성사(聖事) 구원의 방편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신봉한

로마카톨릭 전통적인 신앙체계에서는 사제들이야 말로 교회 본질의 핵심이 되어 구원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 주는 신권을 지녔다.

구원의 은총 신권을 위탁 받은 사제들의 구원 표준은 평신도들의 구원의 표준과 달랐다.

청년 부자 법관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야 하고, 완전하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는 말씀을

이중구조적으로 이해하여 앞 부분의 명령을 평신도의 구원 조건으로, 뒷 부분을 성직자의 완전 기준으로 이해한 경우가 있었다(19:16-22).

이런 전승은 콩가르(Yves Congar)가 교회 내에서 교인들의 등급을 주장했다[The Wide World My Parish and Its Problems (Baltimore: Helicon, 1961), 101-104.]라는 표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빛을 더 받은 사람이 더 중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12:48). 우리 각자는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일점이라도 적게 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봉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정확히 따지신다. 사용하지 않은 재능에 대해서도 선용(善用)한 것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주께서는 책임을 추궁하실 것이다”(COL 362-363).

빛이 더 크고 위험 신호가 더 명료할수록 빛에서 돌이켜 흑암으로 간 자들의 죄책도 더 크다. ”(CS 137).

그러나 이런 류의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심판 문맥을 배경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지 구원의 이중구조적 메시지로 적용하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남은자의 세대에게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표준을 제시하였는가?

,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마지막 세대인 144,000에게는 구원의 다른 표준을 주셨는가?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14:1).

묵시문학에 나오는 이 마지막 144,000명 세대와 짐승을 따르는 온 세상 사람들이 지닌 특성을 몇 가지로 대비할 수 있다.

 

1.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이 오른 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것(13:16)과는 달리 마지막 예수 세대는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지녔다.

2.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이 타락한 바벨론의 음악에 절여있는 것(18:22)과는 달리 마지막 예수 세대는 새 노래를 부른다(14:3).

3.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이 지상의 타락한 정치적-종교적동맹체를 결성하여 동침하고 있는 있는 것(18:3)과는 달리 마지막 예수 세대는 큰 음녀와 동침하기를 거절한다(14:8).

4.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 즉 온 세상이 짐승을 따르는 것(13:3)과는 달리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14:4).

5.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이 당대 통치자들의 속임수와 기만을 받은 것(13:14)과는 달리 마지막 예수 세대는 입에 거짓이 없다(14:5).

6.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파산당한 것(18:4, 5)과는 달리 마지막 예수 세대는 흠이 없는 자들이다(14:5).

 

이런 대비에 비추어 보면 마지막 예수 세대는 역사의 석양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확실이 반문화적-반문명적인 높은 표준을 지닌 자들임에 틀림 없다.

144,000이라는 수는 상징적인 수이다. 이 수는 우상, 죄악에 절여져 사는 지상의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른 자들을 나타내고 있다. 각 지파별로 12,000명이라는 수 자체가 유대인 성인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정절이 있는 다(7:4; 14:4)는 특성이 벌써 문자적으로 볼 수 없게 한다. 또한 문자적 제한 해석을 하는 살마들은 자기만 남아 있다고 한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 두었다는 하나님의 깨우치심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마지막 예수세대는 이전 예수 세대들이 이루지 못한 고차원적인 표준 속에서 살았는가?

1. 144,000명만 흠이 없고 그 이전 예수 세대는 흠이 있었는가? 홍수 시대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blameless- 흠이 없는 자, NIV)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6:9). 아브라함도 욥도 마찬가지로 흠이 없었다(17:1; 1:1).

2. 144,000명만 입에 거짓이 없었는가?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두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1:47)라고 평가하셨다.

3. 144,000명만 어린양을 따랐는가? 에녹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다(5:24),

4. 144,000명만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순결하였는가? 요셉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그들도 영적으로 순결하였다(39:10; 3:10).

5. 144,000명만 구원의 새 노래를 부르는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의 노래를 불렀다(15:1).

6. 144,000명만 인을 받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나라가 결단나는 혼돈 속에서 인을 받았다(9:4).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인을 받아왔다(1:13).

7. 144,000명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가(14:12)? 다니엘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였다(6:13).

8. 144,000명만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가(14:12)? 바울도 예수의 믿음을 지켰다고하였다(딤 후 4:7). 그는 이런 자세를 디모데에게 지니도록 권고하였다.

 

구속의 경륜이 선포된 때부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표준은 변함이 없어 왔다. 마지막 예수 세대라고 해서 이전의 예수 세대에 비하여 월등하게 높은 표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사에 있어서 144,000명의 독특성은 무엇인가?

 

1. 숫자의 집합적 독특성

144,000이라는 숫자는 지상 역사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거룩성을 견지한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점에 그 특성이 있다. 그들은 에녹, 노아, 요셉, , 나다나엘 또는 바울처럼 격리되어 여기 저기에서 고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지막 시대에 예수 세대인 144,000명은 죄악적인 바벨론적인 문화와 문명을 항거하면서 마치 나침판의 바늘이 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키듯이 말씀에 토대를 둔 신앙양심에 충실하기로 뜻을 정하여 살아가는 마지막 시대의 에녹들, 침례 요한들, 마리아들, 에스더들, 또는 다니엘들이다. 그들은 욥처럼(13:15)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12:11) 백성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격의 관제탑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성품을 반사하면서 마귀가 빠뜨리는 곤경 속에서라도 빛을 발하는 백성들이다.

 

2. 역사적인 독특성

144,000명은 마지막 환난과 우주적 심판을 통과하여 살아남는 예수 세대이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12:1). 이들는 불시련 환난 중에서라도 다니엘처럼 창조주와 재창조주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고 우뚝 설 것이다. 선택 받은 이들은 땅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아 승리의 새노래를 합창하는 백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