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1 장

공격받는 기독교

 

강의 후에 한 청년이 다가왔다 - “말씀하신 내용이......갑자기 제 머릿속에 전구가 하나 켜진 것 같았습니다.” 가까이 서 있던 젊은 아가씨가 말했다, “오늘 저는 기독교에 관한 제 이해가 마치 영화를 중간에서 보기 시작한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됐어요 - 선생님께서 저를 처음으로 데려가 주셨지요 -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중년의 남성이 다가왔다, “이 자료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관한 이유를 푸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열쇠이기도 하지요...... 감사합니다.”

오늘날은 도전의 시대다. 전반적으로 사회는 기독교에 더욱 반기를 들고 있다. 우리는 몇 개만 주섬기더라도, 동성연애와 요구에 의한 낙태, 권위에 따르지 않으려는 태도, 일하려 하지 않는 태도, 자유 분방한 결혼생활, 자유 분방한 의복, 도색 문화의 증가, 불법의 지속적인 증가를 목격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소위 기독교 국가에서도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사회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냉소적,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이 되며 복음에 대해 닫혀있는 듯이 보이는가? 이러한 변화에는 무언가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 책에서 현대 사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는가에 관한 근본적 이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주님을 위해 영혼을 개심시킬 수 있는 성서적인(따라서 성공적인) 길이 소개될 것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우리 사회가 기독교적 절대 윤리에 기초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성적 탈선이나, 쉽게 이혼하는 일, 공공연한 불법, 요구에 의한 낙태, 도색 문화와 공중 앞에서 나체가 되는 일은 그릇된 일로 간주되었다. 위법자에게는 사회로부터 다양한 제재가 가해졌다. 가치 판단은 기본적으로 성서적 원칙(예를 들면, 십계명)위에 세워졌으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거나 존중했었다.

최근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버려지면서,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기반에 대해 질문해 오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가 왜 십계명을 지켜야만 하는가? 왜 누군가 동성연애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왜 여성은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는가? 사람들은 일단 하나님을 자신의 양심 속에서 제해버리면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따라서 소유주)로 여기는 기독교적 절대 윤리에 기초한 모든 법을 바꾸려고 든다.

기독교적 절대 윤리는 사회의 기초로서의 의미가 희석되거나 제거되어져 왔고 다음과 같은 세속적 시각으로 대치되었다. “우리는 기독교적 방법(우리의 세계와 삶의 목적을 성서적 원칙에 기초하는)이 유일한 길이라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든 종교적 신념과 삶의 방식을 관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 “관용”은 실제로 기독교적 절대 윤리에 관한 “비관용”을 의미하고 있다. 관용에 관한 이런 그릇된 생각은 교묘하게 기독교를 전복시키고 있으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시각을 사회에 부여할 권리가 없다고 믿도록 기만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낙태 반대론자들이 그들의 특별한 편견을 사회에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한 번이라도 낙태 찬성론자에 대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결과적으로 낙태 찬성론자에 의해 하나의 편견만이 사회에 부가되고 있다 - 요구에 의한 합법적 낙태!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시각이 부가된다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덫에 걸려서 중립이 있다고 믿고있긴 하지만, 중립이란 없다.

중립은 많은 신학교와 성경 학교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창세기에 대해 어떠한 독단적인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견해를 포용한다.” 하지만 누군가 와서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취해야만 한다는 견해도 인정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견해를 포용하기 때문에 그 견해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학생들에게 교리적인 견해를 가르치기 위해 교리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 원하지 않는다면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취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견해.

내가 개최한 어떤 강의에서, 한 사람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당신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취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6일을 필요로 하셨으며, 진화론은 사실이 아니고 실제로 세계적인 홍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견해를 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처럼 하나님께서 진화를 사용하셨고 창세기가 단지 상징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관용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그 사람이 대답했다. “다른 견해도 인정해야 하고 당신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포용해야 합니다.” “좋아요”, 나는 말했다.“제 견해는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이 올바른 견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관한 다른 모든 견해는 옳지 않습니다. 제 견해를 포용해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고 머뭇머뭇 거렸다. 나는 그 사람의 생각을 거의 읽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예라고 대답하면 저 사람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 되고, 아니라고 말하면, 나는 분명히 그의 견해를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군 - 뭐라고 해야되지?” 그리고 나서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건 말장난이에요!” 그 말의 본 뜻은 자신이 논쟁에서 졌으며 내 위치에 관한 자신의 비관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독단적이며 폐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독단적인 진술에 당황한다. 그들은 말한다. “그렇게 독단적이면 안돼요.” 본질적으로 이 진술은 독단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독단적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독단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신조가 독단적일 만한 최선의 신조이냐 하는 문제다.

한 번은 “관용”이라 불리는 그룹이 출범했었다. 그들은 모든 종교적 방식과 신앙, 관습을 포용한다고 주장했으며, 사회에서 비관용을 멈춰야만 한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견해를 설명하는 권장물에서 이 그룹이 자신들이 반대하는 모든 것을 나열한 일은 흥미로왔다. 그리고 그들이 포용할 수 없었던 대부분은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참 뜻은 그들이 기독교를 제외한 사회의 어느 것이라도 포용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편견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절대 진리 따위는 없다는, 혹은 진리는 완전하게 알 수 없다는 생각에 기인하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제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여기는 반성서적 철학에서 유래하고 있다.

기독교적 절대 윤리 - 변하지 않는 성경의 진리와 표준- 은 사회에서 점점 더 배격되고 있다. 종국에는 기독교를 법으로 금지하는 일이 야기될 것이다. 기독교적 절대 윤리가 사회의 기초였을 때는 동성연애나, 도색 문화가 법으로 금지되었었다.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상대적 도덕에 기초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이 위협되지 않는다고 다수가 설득되는 한, 우리는 자신 이외의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결과적으로 성적 탈선이나 대중앞에서 나체가 되는 일,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하는 일(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것도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점점 더 관대하게 변하는 법)에 대해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투쟁이 근본에 관한 문제(창조/진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이 생각이 독자에게는 이상하거나 새롭게 들릴 지 모르지만, 성서적으로 또한 논리적으로 이 문제는 인간의 영혼을 위한 싸움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조/진화의 문제가 수반하는 문제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문제를 인지하기보다는 진화론이 과학이라고 믿도록 기만당하고 있다. 진화론은 결코 과학이 아니다.(2장 참조) 진화론은 과거에 대한 신앙이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현재만을 가지고 있다. 모든 화석과 살아있는 모든 동식물, 지구, 우주, 만물은 지금 존재하고 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가 현재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실험을 반복해서 그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는 일을 포함하는)으로 과거를 시험할 수 없다.

정의에 의하면, 특별 창조 역시 과거에 대한 신앙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차이점이라면 창조론자는 창조에 대한 이해를, 창조 당시 그곳에 계셨고 만물에 대해 알아야 될 모든 것을 아시며 무엇이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분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한 책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그곳에 있지도 않았고 전지(全知)하다고 주장하지도 않는 인간의 말에 기인한다. 총 논쟁의 중심부에는 창조 당시 그곳에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냐, 아니면 그곳에 있지 않았던,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말을 믿느냐 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이른바 “과학 시대”에, 과학이 실제로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되는 지에 대해 아주 소수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하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자를 흰색 실험복을 입고 진리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편견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자에는 두 기본 형태, 즉 남자와 여자가 있으며 그들은 당신과 나와 꼭 같다. 그들은 믿음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편견은 물증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특히 특정 증거가 다른 증거보다 더 적절하거나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성향을 결정한다. 과학자들은 객관적인 진리의 탐구자가 아니다; 그들은 중립적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편견을 잘못 이해하며, 어떤 사람은 편견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신론자를 예로 들어보자: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다. 무신론자가 이런 질문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셨나요?” 대답은 “아니오”다. 이 질문을 질문으로 간주하기만 해도, 그들은 더 이상 무신론자가 아니다. 따라서, 화석과 자신 주위의 세계를 바라보는 무신론 과학자에게는 어떤 증거를 발견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증거는 노아 홍수와 같은 성서적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아라랏산 위에서 큰 배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는 이 증거가 노아의 방주에 관한 성경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즉시 그는 자신의 무신론적 틀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무신론자는 편견을 100퍼센트 가지고 있다. 교과서를 읽거나 무신론자가 만든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볼 때는 항상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나는 편견이 다양하게 제시되는 실례를 많이 보아왔다. 나는 콜로라도주 덴버의 라디오 토크쇼에 있었고 그 라디오 아나운서는 내가 창조에 관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7분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단지 뒤에 앉아서 듣기만 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이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다른 관련 주제에 관해서 말하는 바를 자세히 이야기했다. 나는 다양한 문화와 화석이 주는 증거가 성경이 말하는 바를 어떻게 뒷받침하는 지 설명했으며, 성경의 진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창조의 다른 다양한 측면들도 다뤘다. 7분이 끝나자 아나운서는 다음과 같은 평을 방송에 냈다. “글쎄요, 저는 창조에 관한 증거를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충분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말은 그가 자신의 편견: 불가지론- 을 고수하기 원했기 때문에 내가 제시한 증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누구도 무언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고 믿으며 따라서 아무리 많은 증거를 듣더라도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저는 몰라요.” 알게되는 즉시 그는 불가지론자가 아니다. 성서적 견지에서 보면 로마서 1장은 창조에 관한 증거가 우리 주위에 둘러있으며 따라서 창조주와 구세주를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특별 창조를 인정하기 위해서 창조주를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집을 설계하고 지은 건축가와 건설업자를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뒤에 이성적인 설계자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시론자, 즉 역사의 하나님께서 책(3,000번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책)을 통해 당신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셨다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가? 그러한 사람이 반대 질문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질문을 고려해볼 수 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계시론자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계시론자(유신론자)는 종교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증거를 다루는 일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종교적 견해의 가정(신앙)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편견을 가졌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어떤 편견이 편견이 될만한 최상의 편견인가 하는 것이다.

창조과학에 관한 편견의 현란한 예들은 공립학교에서 볼 수 있다. 다음의 대화는 공립학교 체계 안에 있는 학생들의 매우 전형적인 편견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다. 창조에 관한 발표 뒤에 한 학생이 말했다. “노아의 방주는 사실일 리 없습니다 - 그는 모든 동물을 배에 태울 수 없었을 거예요. ” 저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노아가 얼마나 많은 동물을 배에 태울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는 늘상적인 대답을 했다.“몰라요, 하지만 확실히 그 일은 일어날 수 없었어요.” 나는 방주가 얼마나 컸냐고 물었다. 그는 다시 대답했다.“ 몰라요, 하지만 노아는 동물들을 다 태울 수 없었을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 학생은 노아의 방주가 얼마나 컸으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동물을 태우실 필요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미 이 이야기가 일어날 수 없는 동화이야기라고 단정지은 것이다.

어느 마을에서, 창조과학 사업의 열렬한 지지자 한 분이 자신이 한 지방 대학에서 노아방주에 대해 동료 학자들에게 이야기한 일을 말해주었다. 그들은 물론 그 아이디어를 비웃고 조롱했다. 그리고나서 그 분은 앞으로 누군가 아라랏산에서 노아방주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한 동료 학자가 그 분에게 돌아서더니 만약 그들이 아라랏산에서 노아방주처럼 보이는 큰 배를 발견하고 그 배를 도심의 주도로에 끌어다 놓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믿기를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편견이 드러난 것이다.

나는 논리적으로 설득력있게 학생들에게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져왔다. 그러면 많은 학생들은 선생님께 도움을 구해서 내 오류를 보일 수 있는 논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학생들의 얼굴에 나타난 표현을 읽기란 어렵지 않다. 얼굴의 표현들은 이 모든 것이 설득력있게 들리지만,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실제로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뭔가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선생님은 내 잘못을 밝혔다고 학생들에게 들릴만한 질문을 함으로써 응수하기도 한다. 학생들의 눈에는 내가 그 질문을 대답할 방법은 전혀 없다. 때때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환호를 터뜨린다(내가 끝장났다고 생각됐을 때 즐기는 그들의 방법). 하지만, 내가 그런 질문에 조리있는 설명을 할 수 있을 때면 학생들의 얼굴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입이 쩍 벌어지는 것을 보는 일은 유쾌하다 -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이미 마음을 굳혔으며 성경을 믿기를 정말로 원치않는다고 결정했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일은 편치 않다.

때때로 자신의 편견을 어떻게 바꾸냐는 질문을 받는다. 좋은 질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분야에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빛 아니면 어두움 가운데서 걷고 있거나(행 26:18), 모여있든지 흩어져 있든지, 혹은 그리스도를 위하든지 반대한다고(마 12:30)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누구도 중립이 아니며 모두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죄를 깨닫게 하고 진리를 확신시키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우리의 편견은 바뀌어 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고 정중한 방법으로 제시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입을 통해 그들의 마음과 이성을 그리스도를 향해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일이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편견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이해한다고 믿는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견을 가졌던 잃어버린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을 성령의 힘으로 변화시키시면서 그들의 편견을 어떻게 바꾸어 놓으시는지 봐오고 있다.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자에게 이야기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우리가 말하는 바를 듣는 태도에 편견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믿지 않는가에 대한 선입견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과학에 대한 우리의 자격 등등에 대해 그들이 추측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기초

영향

편견

무신론

하나님의 존재 부정

창조를 고려할 수 없음.

100%

불가지론

상관하지 않음

알 수 없음

알 지 못함

하나님의 명확한 역할을 배제해야만 함

열려있는가?

100%

유신론

추론된 하나님

절대적 윤리 없음

100%

계시론자

사람에게 계시된 하나님

절대적 참조 요점들

100%

 

창조론자들이 말하는 바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거나 잘못 해석하는 진화론자의 예는 많다. 그들은 우리가 출발한 시각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진화론적 귀”를 통해 듣는다. 창조론자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죄로 타락했고, 지구는 저주를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노아 홍수를 내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셔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메시지는 창조와 타락, 구속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균일론적 용어들(즉 기본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계-죽음과 악전 고투의 세계-가 수백만년 동안 내려왔다는 것)을 가지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창조론자의 역사적 관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게리 파커박사가 호주 빅토리아 주의 라트로브 대학에서 온 한 교수와 토론할 때 재미있는 예가 하나 나왔다. 그 교수의 주장의 핵심을 맴돌던, 창조에 관한 진화론자들의 논박 중 하나는 세계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기에는 너무나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타락과 홍수의 영향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과 같은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히 전해진 후에도 이 특별한 진화론자는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창조와 진화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창조론자와 진화론자 양쪽이 고수하고 있는 신앙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예에서는 진화론자인 생물학자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날에 모든 동물을 만드셨다면 왜 캄브리아기 지층의 잉꼬와 쥐를 삼엽충 옆에서 발견하지 못하지요? 파커 박사는 화석 기록은 세계적인 홍수의 분류 작용 측면에서 봐야한다고 이 과학자에게 설명했다. 동물과 식물은 다른 지역에 살기 때문에 그들은 특정 환경을 대표하는 침전물에 갇혔을 것이다. 편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적 입장에 대해 오해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보게된다.

독자는 우리가 창조와 진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신앙, 즉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 논쟁은 진화론자들이 꾸며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종교 대 과학이 아니다. 이 논쟁은 종교 대 종교이며 한 종교의 과학 대 다른 종교의 과학이다.

진화론은 인간의 의견을 최고로 삼는 종교적 견해다. 앞으로 보게될 것처럼 진화론의 열매는(창조주와 법의 시여자를 거부하기 때문에) 불법과 부도덕, 음란과 낙태, 인종 차별과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창조론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종교적 견해이며 창조론의 열매는(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다. 창조와 진화의 문제(하나님이 창조주이신가?)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들의 초점이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해야만 하는 근본적인 문제이다. 창조와 진화의 문제는 실제로 대쟁투가 고조에 달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