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2 장

진화론은 종교다

“진화론자”라는 용어는 이어지는 장(章)들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들에서 우리는 진화론과 성경을 결합시키려 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생각을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진화론자들이 비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는 “진화론자”라는 용어가, 성경의 하나님께서 생명을 책임지고 계시다는 사실보다는 진화론(생존을 위한 시간과 우연, 투쟁의 의미에서)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도록 쓰여졌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이해해주길 바란다.

호주 비평가협회( 이 조직은 미국 인본주의 그룹과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남호주 지회의 공식 정기 간행물인 남부 비평가지 1985년 10월 2권 5호의 총 30페이지가 호주와 미국에서의 창조과학 사업에 대한 공격에 바쳐졌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다: “모든 증거가 창세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어떤 과학적 이론을 뒷받침한다 할지라도 이는 단지 고대 히브리인들이 상식의 사용에 있어 대단히 현명했거나 혹은 운이 좋았음을 보여줄 뿐일 것이다.” 우리를 종교 집단이라고 부르면서 창조과학 사업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이 사람들 자신이 바로 종교 집단이다. 이들은 모든 증거가 창세기를 지지한다 할지라도 창세기가 권위있는 문서라는 사실을 여전히 믿지 않을 것이라고 실제로 말하고 있다.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증거가 무엇이더라도 하나님은 없다고 믿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진화론이 사실이라는 점에는 대단히 완고하다.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철학이다. 우리는 창조과학 사업에서 사람들에게 창조론과 진화론 모두 삶의 종교적 견해로서 사람들이 그 위에 철학과 과학 또는 역사에 관한 자신들의 특정한 모델을 쌓아 올린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과학 대 종교가 아니라 종교 대 종교(한 종교의 과학 대 다른 종교의 과학)의 문제이다.

유명한 진화론자인 데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북미 생물학 교사지 1973년 35권 3호 129페이지에서 피에르 테이하드 드 샤르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진화론은 모든 사실을 밝혀주는 빛이며 모든 주류의 사고가 따라야만 하는 궤도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이 진술은 요한복은 8장 12절에 인용된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사야 2장 5절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라고 권고 받고 있다. 같은 장 22절에서 우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점을 보이는 데는 그다지 많은 노력이 들지 않는다. 물론 과학에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오감(미각,시각,후각,청각,촉각)을 사용해서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 관찰과, 그 관찰의 반복이 포함된다. 당연히, 우리는 현존하는 것만을 관찰할 수 있다. 어느 과학자도 제안된 바와 같이 수백 만년 동안 존재하면서, 추측되는 바처럼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생명이 진화론적으로 진보했다는 사실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살아있는 어떤 과학자도 원시 바다에서 첫 번째 생명이 형성되는 것을 관찰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어떤 과학자도 100억 혹은 200억년(혹은 심지어 10,000년이라도!) 전에 일어났다고 추측되는 빅뱅을 그곳에서 관찰하지 못했다. 어떤 과학자도 그곳에 있지 않았다 - 어떤 인간도 그곳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런 사건들은 분명히 오늘날 반복될 수 없다.

과학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는 현존한다. 모든 화석과 살아있는 동식물, 세계와 우주 - 실제로 만물이 지금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학생들을 포함한)은 과학자들이 단지 현재만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은 그곳에 있지 않았지만 현재의 모든 증거들(즉, 화석과 동식물 등등)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말에 기초한 과거에 대한 신앙이다. (웹스터 사전은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충성과 믿음으로 고수되는 주의, 원칙 혹은 신앙체계.” 분명히 이 정의는 진화론을 적절하게 묘사해준다.

상식만 있어도 700 - 2,000만년 전에 존재했다고 추측되는 공룡 시대가 발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수백 만년 전이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죽은 공룡을 발굴하고 있는 것이다.

화석 뼈들은 그들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말해주는 꼬리표를 달고 나오지 않는다. 화석들은 동물이 오래 전에 지구를 배회할 때의 생김새를 말해주는 사진을 갖고 있지도 않다.

박물관을 방문하면 유리 진열장에 가지런히 정돈된 뼈조각들과 다른 화석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들은 종종 그 동물들과 식물들이 자연 환경에서 그렇게 보였으리라고 생각하는 화가의 인상을 반영하고 있다. 화석을 발굴하지 그림을 발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 화석들은 현재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타즈매니아에는 대부분이 엄지손가락 끝마디보다 작은 수백 만개의 뼈조각이 있는 사암층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어느 특정 발굴 장소에 그림을 걸어놔서 여행자들이 그곳의 동식물들이 “수백 만년” 전에 그 지역에 어떻게 살았었는지 볼 수 있도록 했다. 여러분은 그 뼈조각들을 질릴 때까지 바라볼 수 있지만 과학자들이 그린 그림은 결코 보지 못한다. 그 그림은 그들 자신의 편견에 관한 이야기이며 결국 그런 이야기가, 가능한 모든 것이다.

학교와 대학에서 강의할 때 나는 학생들에게 화석 퇴적물로부터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퇴적물에 들어 있는 모든 동식물이 같이 살았고, 같이 죽었으며, 같이 묻혔느냐고 묻는다. 그리고나서 그들의 대답이 진정한 과학 탐구와 일치되는지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학생들은 이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생물들이 같이 사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같이 살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물들이 같이 죽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 역시 알 수 없다. 아는 전부는 생물들이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에 같이 묻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발견된 것을 가지고 생물들이 살았던 환경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과학의 올바른 사용이 교육 체계에서 강조되어야만 한다.

기원을 포함한 어떤 문제에 대해서라도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다고 항상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아는 일에 달려있다.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자신의 결론이 모두 올바르다고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상의 증거가 발견될 것인지 결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증거가 자신의 결론을 바꾸어 놓을 지도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모든 증거를 가질 만한 위치에 이르렀는지 결코 알 수가 없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 대단한 문제다 -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어떻게 100% 확신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일종의 딜레마다. 마치 TV에서 미스테리 살인 사건을 보는 것처럼.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분명하다. 시청자는 중간 정도에서 누가 살인을 했는지 알게 된다 - 집사. 마지막을 치달리면서 결론은 여전히 명백하다. 끝나기 3분전 여러분이 전에 가지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가 인정되고 이 증거가 여러분의 결론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범인은 결코 집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경의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시작하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골 2:3)는 말을 듣게된다. 인간의 이성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아시는 분을 모시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딜레마에 종지부를 찍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계시하신 것이 참되며 정확하다는 사실에 한 점 의혹도 없다. 그 분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신다(민 23:19). 때가 되면 우리는 더 많이,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식을 더하실 것이지만 당신의 말씀이 이미 계시해 놓으신 것을 변개치 않으실 것이다.

어떤 인간, 어떤 과학자도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과학 이론들은 계속해서 바뀐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나가면서 자신의 결론을 바꾼다.

경제학 학위를 마친 뒤 수십 년 뒤에 자신의 대학 교수에게 돌아가 보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시험 문제를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시험 문제들이 자기가 학생이었을 때와 실제로 똑같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러자 교수가 말했다. 시험문제는 같을 지 몰라도 해답은 이제 완전히 다르다고!

한 번은 어느 미국 대학에서 온 지질학 교수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진화론자들은 새로운 데이터를 발견하면 계속해서 자신들의 이론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진화론이 진정한 과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창조론자의 시각은 성경에 의해 정해졌으며 변화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과학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대답했다. “과학 이론들이 바뀌는 이유는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지요.”

“그래요, 맞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응수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자 내가 말했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증거를 계속해서 발견할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대답했다, “그 말은 우리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맞아요.”, 그가 말했다.

“그 말은 우리가 진화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 아니에요! 진화론은 사실이예요.”. 그는 불쑥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논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편견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창조론자와 진화론자 모두에게 있어 과학의 모델들은 변화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그 모델들이 기초하고 있는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과학적 모델들(해석 또는 이야기)의 기초가 진화론이라는 신앙(또는 종교)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화론자들은 모든 생물이 자연적 과정에 의해 설명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관련되지 않았다(혹은 심지어 필요하지 않았다)는 자신들의 실제 신앙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진화론은 그들이 헌신하고 있는 종교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에 깨어야만 한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