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3 장

창조론은 종교다

 

성서적 창조는 창조주를 높이는 과학(종종 과학적 창조론이라고 불림)의 기초가 되는 종교다. 성서적 창조는 과거에 그곳에 계셨다고 말씀하시는 분(사실 시간의 영역 밖에 계심)의 말씀(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그 분께서는 성령으로 사람을 감동시켜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를 알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기초를 우리에게 주셨다.

 

창조론적 견해가 무엇인지 상세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창조론은 기본적으로 역사에 관한 세 가지 시각으로 구성된다 - 완벽한 창조, 죄에 의한 타락,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회복. 이 개념들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1. 6일 동안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무(無)에서 창조하셨다 - 각 부분은 다른 모든 구성원과 완벽한 일치 가운데서 일하도록 설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역사를 끝내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다. 죽음은 없었다. 사람과 동물은 모두 채식을 했고 지구는 극에서 극까지 기후가 온화했으며 영양분이 풍부한 이상적인 지하 급수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듯이 보인다. 폭풍은 없었다.


 

2.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셨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의 첫 조상이 인간의 의견을 하나님의 말씀 보다 우위에 놓았기 때문에(우리가 지금도 계속 그러하듯이) 투쟁과 죽음이 지구에 들어왔고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저주하셨다. 챨스 다윈은 죽음을 향한 이 투쟁을 “자연 선택”이라 불렀으며 자신의 이론을 창조주를 대신하는 대용물로 내놓았다. 하지만 죽음과 사고는 창조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들은 질병과 결함, 죽음과 쇠퇴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가져온다. 인류의 죄와 반역(타락) 이후에 지구가 폭력과 타락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홍수로 멸하셨고 노아와 그의 가족, 방주의 동물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열어 주셨다. 화석 - 지구를 온통 덮은 물에 의해 놓여진 암반층 속에 ane힌 수십 억의 사체들 - 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켜 준다.


 

3. 홍수 후에, 인간의 의견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인간의 죄 때문에 지구는 다시 폭력과 타락, 죽음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치료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으며 그 분은 죽음과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시고 홍수로 심판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세계는 분명히 불에 의해 멸망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저주가 제거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타락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만약 이 사실이 참되다면, 성경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의 말씀이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올바른 결론을 내리고 싶다면, 확실하고 유일한 길은 절대적인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의 말씀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분야에서 모든 생각을 성경말씀 위에 세워야만 한다. 우리는 유한하고 실수하기 쉬운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인간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에 기초해서 인간의 말을 판단해야만 한다.

 

나는 한 세미나에서 우리가 모든 사고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자 한 목사님이 다소 성난 목소리로 자신이 차를 고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성경을 찾을 수 있어야 되겠다고 토를 달았다. 분명히 그 목사님은 모든 영역에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원칙들이 성경에서 와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원칙들은 불변한다. 성경은 확실히 차를 고치는 방법에 대한 세부 사항을 담고 있지 않다. 한편, 차의 개발을 가능하게 한 현대 과학은 사람들이 과학을 성경에 기초하기 시작했을 때 생겨났다. 그러므로 이 기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학식이 있는 진화론자라면 현대 과학이 성서적 기초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는 것과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가 출발하는 기반에 달려있다. 성경은 모든 영역에서 올바른 사고방식을 계발하는 일에 필요한 아주 근본적인 원칙들과 세부사항을 담고 있다.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말을 가지고 시작해서 성경의 말하는 바를 판단한다. 얼마나 오만한 태도인지!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시라고 요구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권위 아래 완전히 굴복하고 그 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한다. 그렇다. 창조론은 종교지만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고 있다. 진화론은 종교지만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대신에 진화론은 그곳에 있지 않았던 인간 - 전지(全知)하지 않은 인간의 말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인간들은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대적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만약 성경이 전지하신 분의 절대적인 말씀이 아니라면 우리는 가진 것이 정확히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우리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인가: 나의 말, 당신의 말, 아니면 누군가의 말?

실제로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어떻게 결정지을 것인가?

 

어느 세미나에서 한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창조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빅뱅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연과 무작위적 과정의 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아요. 이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나는 대답했다. “좋아요. 만약 당신이 우연의 산물이라면 당신의 뇌 역시 우연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논리를 결정하는 사고 방식 역시 우연의 산물입니다. 당신의 논리가 우연한 과정의 결과라면 당신은 그 논리가 적절하게 진화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논리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말문이 막혔다. 후에 그는 다가와서 이 주제에 관한 최고의 책들에 대해 물었고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절대자(하나님)없이는 자신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음을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의 말하는 바를 취해서 현재의 증거가 어떻게 들어맞는지 본다. 기원과 역사를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창세기를 취한다면 우리는 이 책이 지구가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연속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이 참되다면 발견이 기대되는 것들을 정할 수 있다(이것이 창조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 모델이다). 그리고 나서 세계를 보면서 증거가 거기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델이 들어맞는지 보기 위해 현재- 우리가 가진 모든 증거 - 를 탐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독특한 종류 혹은 그룹으로 창조하셨다고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식물이 종류대로 발견되야 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 즉 한 종이 다른 종을 바뀔 수 없다는. 실제로 이 가설은 우리가 발견하는 것에 꼭 들어맞는다(화석 생물에서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에서도).

 

창세기는 사악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계적인 홍수로 지구를 심판하셨다고 말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어떤 종류의 증거를 발견하게 될까? 우리는 물과 지구 대부분에 걸친 대변동에 의해 놓여진 암반층에 묻힌 수백억의 사체(화석)가 발견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우리가 관찰하는 바이다.

 

창세기 11장에서 우리는 바벨탑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읽게 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만약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어떤 증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세계 각지의 문화에서 온 증거들이 이와 맞아 떨어지는가?

 

다시 한 번 대답은 압도적인 “예”이다. 모든 인간은 서로 생식할 수 있으면 생식 가능한 후손을 생산한다 - 우리는 모든 같은 종이다. 모든 인간은 같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유전학은 우리에게 피부색은 같은 색이 농도를 달리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만약 모든 인간이 같은 선조 - 노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아담) - 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문화는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에서의 분리 이후에 발달한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오늘날 지구의 서로 다른 인종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종”이란 용어는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정의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슬프게도 진화론자들은 이 용어를 어떤 인간 그룹이 다른 그룹만큼 진화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해오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인종이란 말을 쓸 때 실제로 진화한 시점에 따라 서로 다른 수준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 시스템과 미디어를 통한 진화론적 가르침 때문에 일반 대중의 상당수가 인종이란 용어가 진화론적 견지에서 인류에게 적용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인종들이 아닌 한 인종만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 17:26)

 

세계의 대부분의 문화가 그로부터 창세기를 거의 쓸 수 있을만한 이야기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문화는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세계적 홍수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창조의 전설 - 여자의 창조와 죽음이 들어온 일, 최초의 인간과 동물이 채식을 했다는 것에 관한 창세기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은 세계 전체의 문화에 산재한다. 이 사실은 이러한 이야기가 대를 거치며 전해져 내려왔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참된 설명은 성경에 있지만, 지구상에 걸쳐있는 문화의 유사성은 진화론적 신앙의 견지에서는 예측하기 힘든 것이다.

 

바벨론 사람들이 창세기와 유사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기원의 신화를 빌려다가 자신들의 기록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배운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를 자세히 조사해보면 우리는 바벨론의 이야기가 다소 괴기스러우며 거의 모든 면에서 믿기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홍수에 대한 바벨론의 이야기에서는 신들이 서로를 반으로 자르고 물이 내뿜어져 나온다. 홍수에 관한 성서적 설명을 읽으면, 그 이야기는 확실히 더 조리에 맞는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면, 대를 거치면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은 주의깊게 보존되지 않는다 - 특별히 이들이 구전되었을 경우에는 오래될수록 개선되지 않는다. 진리가 잃어버린바 되고 이야기들은 눈에 띠게 퇴화된다. 성경의 기록들은 문서로 전해졌고 하나님의 감찰하심에 의해 주의 깊게 보전되었으며 순수성을 잃지 않았다. 성경에 있는 참된 기록을 단지 반영하기만 하는 바벨론의 이야기들은 오류를 범하기 쉬운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퇴화된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출발해서 이 기초로부터 일한다면 현재의 증거들과 일치될 것이다. 실제로 증거들은 들어맞으며,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시켜준다(성경을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증거를 상세히 담고있는 많은 책들이 이 책의 후미에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실은 과학적으로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창조론과 진화론 모두,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다.

 

창조론과 진화론 모두 신앙이며, 서로 다른 과학적 모델과 증거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창조론자들이 모든 사실에 대해 항상 틀림없이 올바른 설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창조론자들은 유용한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실들이 특별한 용어로 설명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실들은 성경의 기록이 정해놓은 틀안에 들어맞을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 한 과학자가(매우 요란한 태도로) 일어서서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말라고 회중에게 말했다. 그는 노아의 홍수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가 있는 지, 그리고 창조가 틀리다는 사실을 과학자로서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과학은 성경이 그릇되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표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노아라고 불린 사람이 역사에 있다는 사실을 믿냐고 물었다. 그는 그 사실을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왜 믿냐고 물었다. 그는 그 사실을 성경에서 읽었기 때문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세계적인 홍수가 있었다고 믿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나는 왜 세계적인 홍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계속해서 과학으로부터 세계적인 홍수가 있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 즉 과학이 성경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성경이 실제로 노아의 홍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믿지 못하면서 성경이 노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또한 세계적인 홍수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특정 증거가 다른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지구의 나이를 재는 등등에 사용되는 기술 중 상당수에 관련된 가정들을 모두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의 해석이 그릇되고 성경이 옳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그가 언급하고 있는 과학적 방법들의 뒤에 가정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추가 정보는 그의 결론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결론이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리고 나서 과학이 증명하기 전에는 모든 분야에서(예를 들면 노아의 홍수)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한 번 과학의 전모에 관한 이해와 과거에 대해서는 과학이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증거를 그 기초 위에서 해석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과학에 의한 증거에 종속되어 있었다. 물론 여러분이 후자의 접근 방식을 고수한다면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자신들의 이론을 늘상 바꾸어 갈 때마다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도 항상 바뀌어야만 한다 - 여러분은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공립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확실하게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공립 학교에서 처음으로 창조를 가르쳤을 때 내 접근 방식은 달랐다. 나는 진화론의 문제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증거들이 어떻게 창조론적 견해를 뒷받침하는지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진화론자였던 선생님의 반에 가면 그 선생님은 그 증거를 단순히 재해석하곤 했다. 나는 소위 증거론적 접근을 사용해서 증거를 사용해서 그 증거가 진화론이 그릇되며 창조론이 참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확신시키려 했었다.

 

그리고나서 나는 방법을 바꿔서 학생들에게 과학의 참된 속성에 대해 가르쳤다 - 과학이 할 수 있고 없는 것. 우리는 과학자들이 과거에 대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모든 과학자들은 증거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정(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창조와 타락, 노아 홍수와 다른 주제들, 그리고 이 틀 위에 과학적 모델을 세울 수 있는 방법과 관련된 성경에서 비롯된 내 믿음을 그들과 나눴다. 증거가 진화론자의 틀이 아닌 창조의 틀에 일관성 있게 들어맞는 다는 사실이 설명되었다. 나는 소위 “가정론자”의 접근 방식으로 가르쳤다. 차이점은 엄청났다. 다른 반에 가서 선생님들이 증거를 재해석할 때,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말하는 것 뒤의 가정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신앙이 증거를 보는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기원에 관한 문제는 직접적인 과학적 증명의 역외에 있었다.

 

이 일 때문에 어떤 선생님들을 매우 당황하게 됐으며 한 번은 젊은 선생님이 내게 오더니 내가 자신에 대한 학생들의 신뢰심을 망가뜨렸다고 거칠게 말했다. 그녀는 석탄이 수백만 년에 걸쳐서 늪지대에서 형성되었다고 가르쳤고, 나는 석탄 형성에 관해 서로 다른 이론들이 있다고 가르쳤다. 이 선생님은 과학의 한계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고 석탄의 늪이론을 사실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녀의 신뢰도는 학생들에 눈에서 훼손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화가 났던 이유는 그녀가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창조와 진화의 영역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교수 방식을 조심스럽게 연구하라고 호소하고 싶다. 학생들이 전체적인 철학적 영역을 이해하도록 하라. 즉 관련된 전제와 가정들을 이해하게 하라. 학생들은 문제를 더 잘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더 뛰어난 과학자와 사고자(思考者)가 될 것이다.

 

과학의 한계를 강조하는 가정론자적 접근의 또 다른 흥미진진한 결과는 프로그램의 말미에서 학생들이 묻는 질문이다. 증거론자적 접근을 사용할 때는 학생들이 이런 주제에 관해 물었다. “탄소 연대 측정법은요?” “과학자들이 화석이 수백만 년 된 것이라고 밝히지 않았나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분명히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나 근본적인 신앙의 수준으로 문제를 가져가는 가정론자적 접근을 사용하면 흥미롭게도 질문의 속성에 확연한 변화가 오게된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성경이 신뢰할 만하고 참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지요?” “누가 성경을 썼나요?” “왜 기독교가 불교보다 낫지요?” 학생들은 진정한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그 문제는 실제로 신앙간의 투쟁이었다. 이 접근 방식의 결과는 놀라왔다. 많은 학생들이 그리스도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고 기독교에 진정한 관심을 보였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개종이 있었다.

 

이 방법은 공립 학교 학생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학교 학생에게도 효과가 있다. 이 방법은 또한 일반 대중에게도 중요한 방법이다. 이들이 인식하는 것 중 하나는 창조론자와 진화론자가 모두 같은 사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사실에 관한 서로 다른 해석이다. 사람들은 진정한 논쟁을 보게 되기 시작한다 : 두 종교의 대쟁투. 증거(창조론자들이 철저하게 연구하는)는 중요하지만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발표의 성공에 치명적이다.

 

이미 논의된 것과 유사한 자료를 사용해서(더불어 추가적인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캔사스의 기독교 대학의 한 클라스에서 강의를 하고 나자 한 학생이 클라스의 나머지 학생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말한 것은 논리적이고 창세기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매우 설득력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 대학에 계시는 제 지질학 교수님께서 진화론을 믿으시고 당신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틀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 분이 지금 여기 계셨다면 비록 제가 지금 알지 못할지라도 당신이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말씀하실 수 있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지질학 교수님이 여기에 계셔서 제가 지질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들을 말씀하시더라도 그 분의 말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교수님은 틀린 것입니다. 비록 제가 왜 그 분이 틀렸는지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그건 단지 제가 그분의 논증의 오류를 알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셩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항상 올바르기 때문에 저는 제가 창조론자인 지질학자를 데려와서 왜 당신의 교수님이 틀렸는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틀림없이, 성령의 역사하심에서 생기는 확신의 축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을 오류가 없고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된다. 만약 성경이 의문시되고 신뢰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인간이 발견했다고 믿는 사실에 기초해서 성경이 끊임없이 재해석된다면 우리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전지하신 분의 말씀을 갖지 못하게 되며 즉 무엇을 위한 기초도 갖지 못하게 된다. 진리는 영으로 분별되는 것이다. 성령의 거하심없이 진정한 이해란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