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5 장

무너지는 기반

진화론은 과학적 진실로서 대중화되고 소개되어 왔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는 성서적 믿음에 진화론적 믿음을 더해왔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진화를 사용하셨다고 믿는다. 이 이론은 흔히 “유신론적 진화론”이라 불린다. 결과적으로 혼돈이 만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분명한 진술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무엇이 진리이고 아닌지 확신할 수 없으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와 진화 문제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결혼과 의복, 낙태와 성적 탈선, 부모의 권위 등과 같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주제들과 기원은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믿고있는 이유들을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창세기에 나온 창조의 적합성을 먼저 고려해 봐야 한다. 요한복음 5장 46-47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그리고나서 누가복음 16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말을 인용하신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두 성경절 모두 창세기로 시작되는 모세의 저술에 놓여진 최고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창세기를 포함하는 다섯 권의 율법(모세오경)을 분명히 가리키시면서 “모세의 법”이라 언급하고 계시며 모세를 저자로 인정하고 계신다. 사도행전 28장 23절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 설교했다. 이 모든 것이 모세의 저술에 관한 참고문헌이 된다. 또한 모세오경을 제외한 성경에서 다른 어떤 책보다 많이 언급된 모세의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창세기다. 하지만 신학교와 성경학교에서 기독교와 비기독교 집단에서 성경의 어느 책이 가장 많이 공격받고 조롱과 웃음거리가 되고 버려지며 우화화되고 전설화되고 있는가? 창세기! 어느 것보다도 더 많이 인용된 바로 그 글들이 가장 많이 공격받고 신뢰되지 않으며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공격받고 있는 기반

시편 11장 3절은 묻고 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시편기자가 말하고 있는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사회는 도덕적 기반에 의존하고 있다. 때때로 “사회 계약”이라고 불려온 상호 협정에 의해 질서가 잡히고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제한을 가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무가 거절되고 법이 주는 질서와 함께 법 자체가 무너져 내리면 평화를 찾는 인간이 어떤 대안을 갖게 될까? 시편기자는 사회의 기반이 전복될 때, 의인과 선인이 임박한 붕괴를 막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가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꽤 정확하게 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반이시며 그 분은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시편 11장 3절이 사용된 문맥에서,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틀이 세워진 근본적 지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호주나 미국, 한국, 어느 나라 사람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라는 근본적 지식은 그들의 생각에서 제거될 수 있다. 이 움직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며 그 분께서 폐위되셨다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근본적 기반을 버린 나라에서 사회의 총체적 구조가 그 결과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느 무엇의 기초를 파괴한다 해도 그 구조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빌딩을 파괴하고 싶다면 그 기반을 무너뜨릴 때 조기에 성공이 보장된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창세기에 설립되어 있는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다. 사단이 다른 어느 책보다 창세기를 공격하는 일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창세기에 담겨있는 것과 같이 기원에 관한 성경의 교리는 성경의 다른 모든 교리의 기반이 된다. 기원에 관한 성경의 교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반박하거나 훼손하는 일은 성경의 나머지를 그렇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신학의 모든 성경 교리는 종국적으로 그 기반을 창세기에 두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를 신뢰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무언가의 의미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그것의 기원, 기반에 대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창세기는 생명과 우주의 모든 기본적 존재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 생명과 인간, 정부, 결혼, 문화, 국가, 죽음, 사망, 택하신 백성, 죄, 식생활과 의복, 태양계... 목록은 거의 끝이 없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그들의 기원에 달려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복음의 의미와 목적 역시 구세주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고 구세주의 죽음이 해답이 된 문제의 기원에 종속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누군가 당신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안녕하세요, 그리스도인씨. 결혼에 대해 믿으시나요? 결혼이 평생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으세요? 그렇다면 왜죠?” 그러면, 보통의 그리스도인은 결혼이 성경 어딘가에 있고, 바울이 그에 대해 뭔가 이야기했고, 간음은 죄악이며 그에 대해 놓여진 무슨 계명들이 있기 때문에 결혼을 믿는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이 질문들을 생각해보라: 결혼하셨습니까? 왜죠? 굳이 결혼할 필요없이 그냥 누군가와 살면 되지 않나요? 결혼이 평생동안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한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왜 여섯 명의 아내는 안되는 겁니까? 여섯 명의 남편은 어때요? 당신 아들이 집에 와서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하지요? “아빠, 영철이하고 내일 결혼할거예요.”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얘야, 너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건 안돼!” 당신이 아들이 이렇게 대답한다면. “아빠, 괜찮아요. 우리를 결혼시켜줄 교회도 있어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아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아들이 원하더라도 동성애적 생활을 하면 안된다고 주장할만한 어떤 기반이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특정한 믿음을 갖거나, 갖지 않는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종종 이유보다는 많은 의견을 내세운다. 때때로 TV 뉴스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보는 일은 재미가 있다. 동성 부부에게, 결혼한 이성 부부와 유사한 이득을 부여하려는 정부 부처의 통치에 관한 의견을 말하도록 사람들을 인터뷰했던 호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기억한다. 많은 의견들이 이렇게 내세워졌다: “그건 옳지 않아요.” “그건 제 성미에 맞지 않아요.” “틀려요.” “정상이 아니예요.” “나빠요.”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좋지 않아요.” “인정되어서는 안돼요.” “안될 이유가 있나요?” “사람들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많은 표현들이 나왔다.

한 공립 학교에서 창조에 관해 이야기하고 나자, 한 학생이 내게 말했다. “저는 삶에 대해 제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제가 하기 원하는 일을 결정하고 싶습니다.”

내가 말했다. “자네가 원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왜 내가 자네를 쏴서는 안되는가?”

그는 대답했다. “그렇게 하실 수 없어요.”

“왜 그렇지?”

“옳지 않기 때문이예요.” 그가 말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왜 옳지 않지?”

“그건 나쁜 일이기 때문이예요.”

“그게 왜 나쁜 일인데?”

그는 당황해 보였고 내게 말했다. “옳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 학생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기초에 놓고 결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자신이 스스로 규칙을 세우기 원하다고 말하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만약 그가 스스로의 규칙을 세우길 원한다면 분명히 나도 내 규칙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분명히 이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도록 사람들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고, 사회에서 그가 제거되어야 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자 그는 내게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옳지 않아요 - 틀려요 - 옳지 않아요.” 규칙을 정해주는 절대 권위의 기초가 없다면 싸움은 실제로 그의 의견 대 내 의견이 된다. 아마 가장 강하거나 영리한 쪽이 이길 것이다. 그는 요점을 알아차렸다.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가 그릇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의견에 불과하다면 분명히 동성애가 용인될 수 있다는 견해도 다른 견해와 마찬가지로 타당성이 있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누구의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소유하신 분께서 삶의 영역을 주관할 원칙을 위한 기반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관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뭐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사실과 창조주로서 그 분께서 피조물에 대한 직접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소유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인간은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에게 완전히 순종해야만 한다. 절대적 권위의 주관자에게는 규정을 정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길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은 누군가의 의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위에 권위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원칙들과 일치해야만 한다. 자동차 디자이너가 자신이 디자인하고 만든 차가 올바르게 유지되도록 매뉴얼을 제공하는 것처럼, 우리의 창조주께서도 창조물에게 충만하고 자유로우며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되는 모든 지침을 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짖궂게 굴거나 흥을 깨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일련의 지침을 제공하셨다.

때때로 아이들은 그리스도인 윤리에 반항하면서 부모님의 규율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 그렇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아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해 근본적인 입장에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규율을 부모님의 의견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면 왜 그들이 의견에 복종해야만 하는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그 분께서 옳고 그름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가르치면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규율은 하나님께로서 오며, 따라서 순종해야만 한다. 기반없이 구조물을 쌓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이 바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교육할 때 애를 쓰는 일이다. 그러한 시도의 결과는 우리 주위에서 온통 발견된다 - 점점 많은 수가 기독교의 절대 윤리와 하나님을 거절하는 세대.

한 교회에서 몹시 낙담한 아버지가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제 아들들은 기독교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제게 와서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왜 우리가 아버지 규율을 따라야만 하지요?“ 저는 그 규율이 제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야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토대를 어떻게 마련해주고 그 분께서 규율을 정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 줘야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장으로서 아들들이 승리하는 것을 지켜볼 책임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가 전달한 기독교 교리를 제 의견 또는 교회의 의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교회와는 인연을 끊으려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가 아니라 자신의 눈에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오늘날 기독교 사회에서 너무나 흔한 일이며, 근원의 문제에 깊히 연관되어 있다. 많은 부모들은 집에서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올바른 토대를 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다른 기반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가 아니며 우리는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반기를 드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집을 지붕부터 거꾸로 지을 수는 없다. 우리는 기반에서 시작해야하며 그 위에 지어야 한다. 슬프게도 많은 부모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시라는 근본적 이해가 없는 구조물을 다음 세대를 위해 짓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는 완전히 반성서적인 토대가 주어진다: 진화론이라는 토대. 물론 이 토대는 기독교 조직이 서는 것을 용납치 않을 것이다. 다른 종류의 조직 - 인본주의가 이 전혀 다른 토대 위에 세워진다.

너무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고등학교나 대학에 갔을 때부터 기독교에서 방황해 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많은 수가 기독교를 완전히 배척했다. 집에서 올바른 토대를 쌓는 일이 강조되지 않는다면 기독교 조직이 무너지는 일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내 경험에서 나는 많은 기독교 학교와 대학들도 진화론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그러므로 아이들이 기독교 학교에 보내졌다고 해서 반드시 안전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학교는 창조론을 가르친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종종 그들은 하나님께서 진화를 창조에 사용하셨다고 가르친다.

토대가 없는 구조에 관한 같은 문제들이 다른 식으로도 나타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낙태나 성적 탈선, 사회의 다른 도덕적 문제에 반대할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반대에 대해 올바른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옳고 그릇됨에 관한 개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의 입장에 관한 이유의 결여가 다른 사람들에겐 단지 “의견”으로 비쳐진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정당해야만 하는가?

이 모든 문제들은 성경이 무엇인가에 관해 이해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성경은 단순히 삶에 대한 안내책자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 모두가 놓여져야 하는 기반이 된다. 성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서 그리스도인 세계관이 무엇인가에 대해 적절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 47절에서 우리가 모세의 글을 믿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로 사는 것이 그릇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혼의 근본이 창세기에서 온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혼을 정하시고 한 남자가 평생 한 여자를 위해야 한다고 선포하신 사실을 창세기에서 읽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브루스과 아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말라기 2장 15절에 나타난 결혼의 으뜸가는 중요성은 하나님께서 둘이 하나가 되도록 창조하심으로써 그들이 경건한 자손을 내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정하신 특별한 임무를 이해하면 가정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어떤 법안에 대해라도 반대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동성애적 생활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며 그래서 옳지 못하다. 우리의 의견이여서가 아니라 하나님, 절대 권위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특별 참조. 레 18:22, 롬 1:24, 26, 27, 창 2:23, 24)

우리는 자신의 사고와 기독교 교회의 사고 내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절대적 권위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의 의견인지에 관계없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따라야만 하는 원칙들에 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에 귀기울여야 한다. 인간에게 기반을 둔, 의견 중심의 논쟁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에 침투하고 있다. 낙태 문제를 생각해 보자.

나는 낙태에 대해서 토론하는 성경 연구 모임에 가 본 적이 있다. 대다수의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에 관한 의견을 제시할 뿐, 성경과의 관련성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 딸이 겁탈을 당했으면 어쩌시겠어요?” 또는 “아이가 기형이 된다면” 또는 “누군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리고나면 아마도 낙태는 용납될 것이다. 교회는 여기에서 빗나가고 있다. 성서적 원칙의 기초 없이 모두가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교회 안으로 스며 들어왔고 교리를 가려내고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바를 결정하는 일에 많은 장애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낙태는 엄마의 뱃속에서 발달하고 있는 아이에 대해 내새우는 자율적인 인간의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주관해야만 하는 원칙과 관련해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에 관한 문제이다. 시편 139편, 51편, 예레미야 1장과 다른 많은 성경 구절들은 임신되는 순간에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라도 낙태는 인간을 죽이는 행위로 비춰져야만 한다. 그것이 이 문제를 보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 우리는 깨어야 한다.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인간의 견해가 아닌 하나님의 견해를 취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더욱 대담해진다면 오늘날 교회 안의 많은 문제들이 분명히 훨씬 더 쉽게 해결될 것이다. 어느 특정 교단의 대총회에서 여성의 목사 안수 문제가 토의되었다. 벌어지는 일들은 흥미로왔다. 어떤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여성이 남성만큼 똑똑하기 때문에 목사로 안수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여자 의사도 있고 여자 변호사도 있는데 왜 여자 목사는 안되냐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며 따라서 목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총회와 그런 류의 다른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듣기란 얼마나 힘든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사회에서 서로 다른 특별한 역할을 부여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우리가 옳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관해 말씀하신 바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견을 참조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갖기 원한다는 사실이다.

한 모임에서, 어느 여자 분이 내가 말한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해 다소 화난 목소리로 반응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해지기 전에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성경 어디에 그런 진술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성경이 이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녀는 남편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내 질문을 그녀에게 되풀이하면서 성경의 어느 곳에 그러한 진술이 있는지 또는 우리가 그러한 결론에 논리적으로 도달할 만한 원칙이 제시되어있는지 보여달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나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해질 수 없다면 자신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여전히 우겼다.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그녀가 성경이 말하는 바와 상관없이 그녀 자신의 의견을 원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녀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성경에 순종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교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 종종 갖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의 의견이 표현되는 것을 듣게 된다. 나는 집사를 선출하는 모임에 가 본 적이 있다. 혹자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집사가 되야 한다고 제안한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 주어진 집사의 자질이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단지 성경에 주어진 자질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반대한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들에 의하면 인간의 의견이 성경 위에 있었다.

우리는 많은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인 사회를 침투하고 있는 이러한 철학의 전모를 볼 수 있다. 한 기독교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내게 성경의 원칙에 기초한 자신의 엄격한 교육에 많은 부모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의 반대는 보통 다른 학교와의 비교 형식을 띠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아이가 이웃의 아이들보다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표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교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들은 학교에 나쁜 일을 하고도 잡히지 않은 다른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아이들이 처벌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교장 선생님은 만약 이 원칙이 사회에 적용된다면 엄청난 문제들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한 예로, 그렇게되면 단지 다른 많은 운전사들이 높은 혈중 알콜 농도를 가지고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이 우연이 잡게된 높은 혈중 알콜 농도를 가진 운전사를 기소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 부모들은 교장 선생님이 적용한 표준 -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기초한 표준 - 에 당황했다.

바울은 말한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살후 2:15) 우리는 굳게 서 있는가 아니면 흔들리고 있는가? 적나라한 흉폭성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절대성이 거절되는 것, 그리고 단지 인간의 의견만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증가하는 일은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이 외형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현재 교회 도처에 있는 투쟁의 상당 부분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놓고 싸우는 데 원인을 두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나 나의 의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의 문제다. 우리 사고의 기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원칙들이어야만 한다. 그 원칙들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지어야만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창세기가 그리스도인 철학 전체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교회내의 한가지 중요한 어려움은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경의 다른 어떤 책을 신뢰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성경을 막연한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흥미로운 책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시각은 교회와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실에 눈을 떠야만 한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 까지를 문자적으로 취하지 않는 것은 나머지 성경에 대한 모독이다.

고명한 히브리 학자이자 옥스포드 대학의 성경 해석 교수인 제임스 바 교수가 1984년 4월 23일 한 개인적인 편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가 아는 한 세계적 수준의 대학에서 창세기 1장에서 11장의 저자가 독자들에게 1)창조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은 24시간의 날들과 마찬가지인 일련의 6일 동안 일어났다는 것과 2)창세기 족보에 담겨있는 인물들이 세계의 시작부터 성경 이야기의 나중 단계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연대적 사건을 첨가함으로써 주어진다는 사실 3) 노아의 홍수는 세계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방주에 있던 인간과 동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과 동물을 멸망시켰다는 개념들을 독자에게 전달하려 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히브리 또는 구약 성서 교수는 없습니다.”

이 세계적 수준의 학자들의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상당수가 성경 또는 기독교를 여하간 믿지 않으며,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종교를 진화론에 맞추려고 노력하기 위해 성경과 씨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들은 단지 원문의 분명한 의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원한다면 믿지 않아도 좋지만, 창세기가 스스로 말하고 있는 바 외의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고 꾸며대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창세기의 명료한 가르침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와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문자적이나 언어적 학식에 기초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적 사고의 압력에 부분적으로 굴복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