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6 장

창세기는 중요하다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강조를 받아들여야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중요한 기독교 교리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교리에 대해 질문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라.

왜 결혼을 믿는가?

왜 규율들이 있는가 - 왜 옳고 그름이 있는가?

왜 우리가 죄인인가 - 그 의미는 무엇인가?

왜 세상에는 죽음과 고통이 있는가?

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인가?

우리의 신조에 대한 양식을 가지는 일에 중요하기 때문에 각 질문을 주의깊게 고려해 보도록 하자. 사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대답할 준비 즉 믿음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기대하신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은 말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기독교는 무신론과는 달리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며 객관적인 신앙이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믿음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신다. 히 11: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에 대한 이유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증언은 약화되며 조롱의 소지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 가지고있는 형태의 지식과 이해심으로 무장함으로써 성경을 이성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이 진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 지 알지 못하며, 그 결과가 많은 것을 믿지만 왜 그런지 확신하지 못하는 김빠진 그리스도인 세대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이성적 이유를 나누는 일에 실패한다면 개인적 증언은 영향력을 상실할 것이다. 조롱과 모욕을 그리스도의 이름에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은 피해야 한다.

우리의 믿는 바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좋은 실례를 아리조나 신문 편집장에게 보내진 편지에서 볼 수 있다. 편지는 다음과 같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 하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적다고 믿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노아와 세계적 홍수 후 오천 년에서 만년 뒤에 쓰여졌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고, 그보다 얼마나 적은 사람들이 쓸 수 있었을까요? . . . 학교 수업에서 창조론을 가르치신다고 하셨지요? 이 질문들에 대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노아가 동물 각각을 둘씩 방주에 태웠다면, 북극곰과 들소, 캥거루는 어디에 놓았을까요? 그 동물들이 당시에는 동부 지중해 지역에 살았다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요. 다음 질문은 5,000년 동안 혹은 50,000년이라 해도 어떻게 하나의 백인 가정(햇볕에 그을린)에서 다양한 색의 인간이 발전할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 저는 아주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났고 성경이나 다른 종교 서적에 대해 의문을 갖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어떠한 해답도 얻지 못했으며 저는 7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이성적인 설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 편지의 저자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했으며, 이야기하면서 그가 성경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종용받았다는 사실과 쓸만한 대답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대답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그는 복음의 기독교를 버리게 되었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러한 종류의 질문에 대한 해답들은 오늘날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된 주제들에 관해 토론할 때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자”.

결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에서 이혼에 관해 질문받으셨을 때, 즉시 그 기원, 즉 결혼의 기반에 대해 언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했느냐?” 예수님께서 어디를 인용하셨는가? 창세기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같은 절을 인용하셨다 - 창세기 1장 2장이 창조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설명이라고 그릇되게 말하는 사람은 부록 1을 참조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결혼에 대한 역사적 기반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느냐?” 이런 역사적 기반이 없다면 결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유일한 기반은 성경에 있다. 기반이 없다면 여러분에게는 남녀간의 결혼이 편리하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당신의 아들이 철수와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또는 영미가 수희와 결혼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혼외의 관계도 포용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이제 창세기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남자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잃게 된다. 그 남자의 옆구리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만드셨다. 기록된 아담의 첫 마디는 이렇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들은 한 육체였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그들은 하나가 된다. 이것이 역사적 기반이다. 또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부모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없는 것처럼 서로 굳게 결합해야 한다. 우리는 이 관계가 이성간의 관계라는 사실을 안다. 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남자와 남자가 아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혼의 유일한 기반이며 동성애적 행위와 욕구가 사악하며 정도를 벗어나고 비자연적인 탈선이라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 동성애를 자연적이거나 정상적인 것으로, 혹은 받아들일만한 대안 정도로 인정하는 일이 증가하는 경향에 대해 교회가 반대 입장을 취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바울에게 역사적 기반이 없었다면 그는 로마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동성애에 관해 쓰지 않았을 것이다(그리스도인으로서 동성애의 죄악은 나무라야 하지만 동성애자에 대해서는 자비로와야 하고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기 바란다).

결혼에 대한 나머지 가르침은 어떠한가? 가정에 있어 다뤄져야 할 다른 문제가 있다. 이 문제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분열되고 자녀들이 잃은 바 된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아이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아버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주어진 성서적 역할을 보면, 자녀들을 부양하고 가정의 영적 및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는 책무는 아버지에게 할당되었다(사 38:19, 잠 1:8, 엡 6:4). 이 역할 반전의 결과로 종종 아들들이 교회에 나오는 일을 그만둔다. 결혼 관계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적절한 가르침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 소녀들은 흔히 비그리스도인 남성들과 연애하고 결혼함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한다.

한 젊은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 자신이 비그리스도인과 결혼했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 남자와 연애할 때 그를 아버지와 비교했고 뚜렷한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정의 영적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버지와 연애하던 사람 사이에 큰 차이점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야만 한다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결혼했고 자녀가 있었으며,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결혼에는 첨예한 문제들이 존재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가정에 산재해있는 문제들의 주요 원인은 아버지가 가정의 제사장이라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책무를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그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제사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관계가 남자가 여자 위에 전제군주적으로 행동하는 “지배자”적 관계는 아니다. 여성해방론자들은 성경이 결혼에서 전제군주적 관계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압제할 힘을 추구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에 있는 절대적 역할을 악용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별 전체를 완전히 놓쳐버리고 있다(엡 5:22,23, 요 13:5). 성경은 또한 우리가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엡 5:21). 우리가 성경에 놓여진,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가정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보통 문제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남편들에게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엡 5:25). 많은 경우에, 만약 남편들이 아내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많은 여성들에게 있어 남편에게 복종하는 일이 더 쉬워질 것이다.

의복

왜 우리가 의복을 입는지 생각해보자. 보온을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열대 지방에 산다면 어떨까?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인가? 이런 것들이 유일한 이유라면 왜 의복을 입는가?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서 왜 의복을 벗지 않는가? 대중 앞에서 나체가 되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가? 종국적으로 의복을 입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덕적인 것에 있다. 도덕적인 이유가 있다면 어딘가 기반이 있음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그 도덕적 이유와 연결된 표준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표준인가? 우리 문화의 대다수가(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시대의 유행을 그냥 수용하고 있다. 부모들이여. 자녀들 교육은 어떠한가? 의복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해리언 밀은 자신의 논문 “그리스의 의복 규정 :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약 100년 전, 의복이 정숙을 위해 입는 것이라는 성경에 기초한 이론이 사라진 후, 의복의 기원과 기능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인류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우리는 왜 의복을 입는가? 성경으로 돌아가보면 도덕적 기반이 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들이 나체였다는 사실을 읽게 된다. 하지만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는 모든 것을 왜곡시켜 놓았다. 죄는 벌거벗음을 왜곡시켰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곧 알게되었으며 무화과 잎을 가지고 가릴 것을 만들려고 애썼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러 오셔서, 죄없는 동물을 죽임으로써 의복을 제공해주셨다. 이 것이 첫 번째 피의 희생이었다. 의복은 그들의 죄를 가리우는 것이었다.

남자는 성적으로 매우 쉽게 흥분된다. 그래서 반나의 여인들이 텔레비전과 잡지의 광고에 사용되는 것이다. 부모들은 딸들에게 여성의 육체에 의해 남자가 성적으로 얼마나 쉽게 흥분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많은 여성들이 남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내가 어느 교회에서 의복에 관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자, 젊은 여성이 와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지 단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젊은 그리스도인 남성과 연애하고 있었고 왜 그가 종종 그녀에게 어떤 의복들을 입지 말라고 하는지 당혹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왜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에는 자신이 입는 의복이 남자의 마음에 간음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그의 길에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버지들은 딸들에게 남자가 여자의 육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아들들에게 여성의 의복, 또는 의복이 없는 것이 남자에게 거침돌이 될 수 있지만,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이 저지르는 것에 대해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욥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자들은 자신의 눈과 언약을 세워야만 하며 보고 듣는 것으로 말미암아 정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그 언약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남자가 심중에 여자에게 정욕을 품으면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죄는 벌거벗음을 왜곡시킨다.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경험한 완벽한 관계도 변질되었다. 타락 이후에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숨었고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많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실제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의복을 입는다. 그리고 산만해진 많은 눈이 매 움직임을 뒤따른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남자들은 심중에 간음을 저지르고 있다. 그들과 그 여성들은 이런 간음에 대해 대답해야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부모들은 의복에 대한 일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십대들에게 말한다. “그건 입으면 안돼.” 십대들은 대답한다. “하지만 왜요?” “그건 그리스도인답지 않아.”, 부모의 대답이다. “왜죠?”, 십대들은 다시 묻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을 입지 않기 때문이지.”, 부모들은 주장한다. “왜죠?”, 십대들은 반문한다.

그러면 당신은 딸들이 흔히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엄마, 아빠는 구식이에요.” 그들은 부모가 하나의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고수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모의 의견도 아이의 의견도 아니다. 부모들은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 때때로 강요된 법에 의지한다. 부모들이 의복에 관해 이것 혹은 저것을 해야하는 이유를 자녀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를 기반으로 사용한다면, 특별히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그분께서 규율을 정하시고 창세기는 모든 교리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견실하게 가르쳤다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는가. 이런 가르침은 부모들이 “그렇게 할거지?‘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아무 기반 없이 이런 표준을 자녀에게 강요하는 것보다 몇백 배 낫다. 그러나 에베소서 6장 1절은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들은 부모를 순종해야만 하며, 이것도 그들의 의견의 문제가 아니다.

죄가 벌거벗음에 대해 해놓은 일 때문에 의복을 입는 데는 도덕적 기반이 존재한다. 우리는 남자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남자는 성적으로 쉽게 흥분되고 한 여자(그의 아내)에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일은 전에나 지금이나 결혼 생활에서 출산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죄는 이를 왜곡시켰으며 남자가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를 음욕적으로 보는 일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의복은 남자의 길에 놓인 거침돌을 최대한 줄이는 역할을 해야한다. 하지만 남자가 “두 번째 바라봄”에 굴복한다면 그는 결코 죄가 덜하지 않다. 우리는 오늘날 유행을 그냥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의복에는 도덕적 기반이 있다; 따라서 표준이 있다. 남자들이 어떤지 알고, 죄가 벌거벗음에 행한 일을 앎으로써 우리는 표준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해 이해의 기반을 가질 수 있다.

법과 도덕

자녀들에게 법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아마도 이런 것은 옳고 저런 것은 그르다고 말하겠지만, 그들에게 옳고 그름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가?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있다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왜 그런가? 왜 그분께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가?

왜 옳고 그름이 있는가(예를 들어 십계명)? 마태복음 19장 16-17절의 이야기에서는 한 남자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혹은 선하고 악한지 어떻게 결정하는가? 선하신 오직 한 분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따라서 우리를 소유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있으며 그분께 순종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규율을 정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모든 것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즉, 절대적 지식을 소유하고 계시며) 따라서 우리는 순종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윤리를 가지고 있으며, 표준들이 있고,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러한 결정에 아무 기반도 가지지 못한다. 어떻게 표준에 도달하겠는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어떻게 결정하겠는가? 옳고 그름이 있다고 믿는 대부분의 비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윤리를 행사하고 있다.

무신론, 진화론적 철학은 말한다: “하나님은 없다. 모든 것은 우연과 무작위의 결과이다. 죽음과 투쟁은 오늘날의 질서이며 현재뿐만 아니라, 무기한적으로 과거와 미래에 있어도 그러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옳고 그름에 대한 기반은 없다. 사람들은 진화론을 믿을수록 더욱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된다: “하나님은 없어. 왜 내가 권위에 복종해야 하지? 왜 탈선적인 성적 행위에 반대하는 규율이 있어야만 하지? 왜 낙태에 관한 규율이 있어야 하는거야? 결국 진화론은 우리 모두가 동물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낙태로 아이를 죽이는 일도 물고기나 닭의 머리를 자르는 행위보다 못할 것도 없잖아.” 진화론 또는 창조론을 믿는 일은 중요하다! 그 일은 당신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이 문제는 바울이 로마서 3장 20절에서 설명한 단순한 사실로 귀결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7장 7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하나님의 존재는 성경 어디에서도 옹호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명백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가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다. 창조물에 대한 그분의 주권을 의심하는 내용이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하여야 한다는 설명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규율을 정할 권리가 있으시다. 우리는 그 분의 선하심 가운데서 순종하고 기뻐할 책임을 가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두 번째 선택을 했다. 그는 반역을 선택했다. 죄는 하나님과 그 분의 의지에 대한 반역이다. 창세기는 인간 반역의 첫 번째 행위가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다고 말해준다.

죄의 전모- 즉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 - 와 죄를 인식하는 방법을 이해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실 권리와 사랑 넘치는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그 분은 창조주이시며 그 분의 인격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다. 전능하시고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하나님께서는 삶을 올바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규율을 정해놓으셨다. 로마서 7장 7절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성경은 각각의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바울이 말했듯이, 법은 최초에 죄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졌다. 하지만 죄를 아는 것은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되지 못한다. 그 이상이 필요했다. 창조주께서는 죄에 대한 변상을 정하시고 그 값 - 자신 - 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창조물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저주를 견뎌내셨고,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심판을 쏟아내시도록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다. 하지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하시는 죽음과 부활을 믿는 우리 모두는 그 분 안에서 살게 된다.

창조주를 반대하는 사람은 절대적인 권위자이신 분 - 규율을 정하고 이를 지키시는 분 - 을 반대하는 것이다.

사사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6) 오늘날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도 스스로 법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진화론을 사실로 가르치며 창조에 대한 믿음을 추방하려 한다. 그들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반역의 속성을 유지하기 원하며 창조주요 법의 시여자로서 그들에게 정확하게 무엇을 해야할지 말해줄 권리가 있으신 분의 권위를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창조와 진화간의 투쟁의 전모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실 권리가 있는가? 아니면 인간 스스로가 결과로 고통받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결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말뿐인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의 본질은 각 개인의 대답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 질문은 인간이 자율적이여서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소유된 바 되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율적이 되기를 원하며 스스로의 바램과 이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고 믿기 원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율적이지 않으며 전투는 이곳에서 고조된다.

주님을 신뢰하며 성령의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보일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지 않으며 창조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 거절의 열매를 나타낼 것이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 5:19-21) 성경은 타락한 뿌리들이 악한 열매를 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도색 문화와 낙태, 동성애, 불법, 안락사, 영아 살해, 느슨해진 풍기, 결혼 등에서 보이는 불성실 - 오늘날 사회에서 점점 더 만연해가고 있는 악습들 - 은 분명히 타락한 뿌리의 열매이다. 이들은 인본주의적 사고라는 퇴비에 굳게 싸여있는 진화의 타락한 뿌리들이다.

진화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아 만족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수되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종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창조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굽혀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 위에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하지 않는다.

심지어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도 인간이 “죄인”으로 묘사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설교자들은(심지어 스스로를 복음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설교자들도) 죄의 정의가 간음이나, 술중독, 마약 중독, 누드화, 성인 영화와 저속한 언어와 같은 것에만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죄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죄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죄는 우리 문화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죄가 우리의 생각 전체에 만연해 있으며 따라서 행동 전체에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법의 시여자시라는 사실과 모든 인간은 그분께 복종해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2:10-11에 모두가 그렇게 할 시간이 오리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기록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0-11)

하나님의 말씀(완벽한 창조주의 틀림이 없는 말씀)이 우리 사고의 기반이 되어야만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행복하고 안정적인 인간 관계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 - 농업, 경제, 의학, 정치, 법률 시행, 미술, 음악, 과학, 가족 관계 - 에서 참된 그리스도인 철학의 기반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적 사고란 존재한다.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성경의 원칙들이 있다. 창조주께서는 지침이 될 매뉴얼 없이 피조물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시 119:160)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하는 일(모든 영역에서 그 분의 말씀을 사고의 기반으로 시작하지 않고 그분께 복종하지 않는 일)은 우리가 사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이 사실은 어느 호주 신문의 편집장에게 보내진 편지에서 고통스럽게 강조되었다. 농장 일을 위해 결혼한 부부를 찾는 광고를 내기 위해 어느 지역 신문을 접촉했지만, 그들은 “결혼한 부부‘와 같은 용어를 담은 광고는 인쇄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문제는 분명히 ”차별’이었다. “결혼한 부부”라는 용어는 “두 사람”으로 대치되어야만 했다. 어떤 두 사람이 그 일을 지원하던지 상관이 없었다. 질문: “누구의 권위로 이 용어가 출판될 수 없는가?” 대답: “인권 위원회.” 편지의 저자는 당연히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화론적 사고의 열매이며 우리는 유사한 예가 증가할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염려하고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인간의 반역이 치닫고 있는 위급한 방향을 분명히 알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그분께서 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죄의 본질과 죄의 존재의 결과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로부터의 구원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이를 떠나서는 상황을 바로잡을 수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 대한 전면전만이 당면한 사회적, 도덕적 대참사에서 국가를 구원하는 유일한 실제적 희망일 것이다.

창조주가 계시다면 그분께 복종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간이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대안은 없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분께 반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럴 때만, 법을 이해하고 죄가 무엇인지 이해하며, 개개인의 삶이 변화되는데 필요한 단계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개개인의 삶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사회는 창조의 기반과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면 할수록, 영적 및 도덕적으로 퇴화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역사 도처에 수 없이 일어났으며 경고되어야만 한다. 현대판 예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하나님과 그 분의 절대성을 거절한 결과

뉴 기니에 소위 이교도와 원시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교사가 보내졌다. 이 이야기는 후에 식인종에서 탈피한 부족에 관한 이야기다. 전에는 남자들이 마을로 질주해 들어가서 남자 하나의 머리를 잡고 끌고 나와서는 복부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대나무 칼로 복부를 찢고, 내장을 꺼내고, 손가락을 자르고 그가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 죽을 때까지 먹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한다, “오, 원시적인 야만인들!” 그들은 원시적인 야만인들이 아니다. 그들의 조상은 노아라 불리던 사람이다. 인디안의 조상도 노아라 불리던 사람이다. 에스키모의 조상도 노아라 불리던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도 노아라 불리던 사람이다. 노아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으며 배를 지을 수 있었다. 그의 선조들은 악기를 만들 수 있었고 농사를 지었다. 그런 뉴 기니 원주민에게 일어난 일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로마서 1장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그 분의 법을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리석고 그릇되며, 퇴보한 것에게 내어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을 일년 내내 산채로 자르며(미국에서는 매 년 150만 명), 그 일이 합법화 되어 있는 소위 문명화된 나라에서도 동일한 퇴보(하나님의 법을 마찬가지로 거절한 것)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낙태다 - 산채로 사람을 잘라서 조각난 채로 빨아내는 일. 이런 소위 ‘원시적인 부족들“은 한 때 참 하나님과 그 분의 법을 알았던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창조의 참된 하나님을 거절하면서 이들의 문화는 모든 분야에서 퇴화했다. 소위 ”문명화된 나라“들이 창조의 하나님을 거절하면 할수록, 이들은 ”원시적인 문화“로 퇴보해 간다. 따라서, 문화는 진화론적 척도에 의해 가정된 바와 같이 원시적 또는 진보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며, 문화의 모든 분야는 하나님 말씀의 표준에 의해 판단되어야만 한다. 여러분의 나라는 어떻게 측정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