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8 장

진화론의 죄악

다음의 그림과 주석은 지금까지 말한 바를 요약한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믿음을 받아들이면, 그분께서 법의 시여자이시기 때문에 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의 법은 그분의 거룩한 인격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주권자이시며 우리는 그분께 완전히 복종할 의무가 있다. 법은 우리의 의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유익과 당신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 법을 우리에게 부가할 권리가 있으신 분이 주신 규율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분야에서 우리 사고의 토대가 되는 원칙들을 주셨다.

창조의 하나님을 인정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시여자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삶에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따라서 위대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친구가 되고 사랑하고 축복을 내려주시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으셨다.

한편 우리가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우연과 무작위적 과정을 올려놓는 다른 신앙으로 하나님을 대신한다면 옳고 그름에 관한 기반이 없어진다. 무엇이든 우리가 만들기 원하는 것이 규율이 된다. 절대 윤리가 없어진다 - 고수되어야 하는 원칙들이 없어진다. 사람들은 스스로 규율을 만들 것이다.

우리의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기원과 운명에 관한 우리의 믿음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창조의 기반이 제거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관들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있다. 한편 진화론적 기반은 견고하게 남아있으며 그 기반위에 지어진 구조물들 - 불법, 동성애, 낙태 등은 필연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이 관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퇴보를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윤리의 붕괴와 하나님을 반대하는 철학이 증가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그들 모두는 불법과 동성애, 도색문화와 낙태(그리고 인본주의적 철학의 다른 산물)의 증가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전쟁의 근본적인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창조론 대 진화론으로 요약된다.

위의 문제들과 진화론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면 역사에 관한 약간의 기본 연구를 통해 그 관계를 분명히 보일 수 있다. 사실 나는 진화론과 이런 특별한 도덕적 주제와의 관계에 대해 내게 동의하지 않는 학식있는 진화론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했다는 사실에는 반드시 동의하지 않을 지 몰라도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이 진화론을 적용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이 시점에서 내가 말하는 바를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히 다윈의 진화론 이전에도 사악하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철학들이 존재했었다. 다윈이 진화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대중화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낙태를 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사람들이 믿는 바는 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 창조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와 남, 살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특별히 한 때 그리스도인 윤리가 대단히 성행했던 서구 국가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을 정당화시키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릇된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행하는 일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TV 인터뷰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어느 과학자가 말했듯이 “다윈의 진화론 때문에 무신론이 존중받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진화론이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분야를 여러 곳 생각해 볼 것이다. 이 말은 다윈의 진화론이 그러한 태도나 행동의 원인이 되었다기보다는 특정 철학을 그들 보기에 합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윈의 진화론이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이 기사는 헨리 모리스 박사의 저서, “창조와 현대 그리스도인”이란 책에 더 자세히 다루어져 있다.(책 후미의 참고 서적 목록 참조)

1. 나찌즘과 진화론

파시즘의 악명높은 후계자 중 하나인 아돌프 히틀러에 관해서는 많은 기록이 있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처리한 방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진화론에 관한 자신의 믿음에 기인한다. “히틀러의 개인적 안전”(Pergamon, 1979, p264)에서 P.호프만은 이렇게 말한다: “히틀러는 다윈적 원칙으로서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도록 강요하는 삶의 투쟁을 믿었다. 투쟁 없이는 쇠약해지고 멸망할 것이었다. . . 1945년 4월에 패망했을 때도 히틀러는 강자 생존의 믿음을 표명했고 슬라브 민족이 스스로 강자임을 증명했다고 선언했다.”

유명한 진화론자인 아서 키드경은 히틀러가 유태인에게 한 일에 있어서 그렇게 일관적일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히틀러는 다윈의 진화론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었다. “진화론과 윤리”(New York, Putnam, 1947, p28)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화론적 척도와 종족의 도덕이 거대한 현대 국가의 문제에 활발히 적용되는 것을 보려면 1942년의 독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히틀러가 진화론이 국가 정책에 유일한 현실적 기반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헌신적으로 확신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 . . 자기 종족과 국민의 운명을 보증하기 위해 그가 채택한 수단은 유럽을 피로 물들인 도살이었다. . . 그러한 행위는 윤리의 어떤 척도에 비추어 보아도 대단히 비도덕적이지만 독일은 이를 정당화시킨다; 이는 종족 또는 진화론적 도덕과 일치한다. 독일은 종족적 과거로 돌아갔고 그들의 적나라한 흉폭성을 통해 진화의 방법을 세계에 보여주고 있었다.”

2. 인종주의와 진화론

스티븐 J. 굴드는 “자연 역사”(1980 4월, p.14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발생 반복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발달하고 있는 태아가 인간이 될 때까지 물고기 단계와 같은 진화론적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가정한 진화론적 이론)은 백인 과학자들에게 만연했던 인종주의에 편리한 초점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의 행동을 하등 종족의 정상적인 성인의 행동에 비교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괄호 안은 저자의 설명) 또한 백색 인종이 몽골로이드(황인종 : 역자주)보다 훨씬 더 발달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몽골로이드”라는 용어가 정신적으로 결핍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고 굴드는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아이는 실제로 진화의 전 단계로 역전된 것으로 믿어졌다. 20세기 초반의 선도적 고생물학자였던 헨리 페어필드 오즈본은 다음과 같은 믿음을 통해 그러한 경향을 부추겼다. “흑인 혈통은 백인이나 몽고인들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 . 평균적인 성인 흑인의 지능 표준은 호모 사피엔스(인간의 학명 : 역자주) 종의 11살 짜리의 지능과 흡사하다.”(자연 역사 1980년 4월, p.129)

호주의 초기 정착자 중 상당수는 호주 원주민들이 진화론적 척도에서 백인만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덜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호주 타즈매니아에 있는 호바트 박물관은 1984년에 초기 백인 정착자들이 타즈매니아 주에서 가능한한 많은 원주민을 죽였던 이유 중 하나로 이를 들고 있다. 1924년 뉴욕 트리뷴지에는(2월 10일 일요일자) 잃어버린 고리가 호주에서 발견되었다는 글이 대대적으로 실렸다. 언급되었던 잃어버린 고리는 타즈매니아 주에서 온 원주민이었다.

믿기지 않는 일은 우리가 인종주의적 태도를 버리기 원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교육 기관에 의해 인종주의적 태도에 순응되고 있으며 인종주의를 위한 전체적인 근본적 기반이 사람들의 마음을 침투하고 있다.

인류학자들은 진화론적 시각에 의해 진화라는 사다리의 서로 다른 높이에 서로 다른 인종이 위치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이 사실 때문에 지능과 능력에도 서로 다른 수준이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종족은 하나이며(우리가 모두 같은 두 명의 인간에게서 왔으며 따라서 더 낮거나 높은 진화론적 무리가 없다는 뜻에서) 모든 사람이 대등하다고 가르친다.

어느 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만약 원숭이와 같은 피조물이 사람으로 진화되었다면 오늘날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일부 학생은 그녀에게 어떤 원주민들은 원시적이며 따라서 여전히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진화론의 가르침 때문에 호주 원주민은 아이들의 눈에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비추어진 것이다.

3. 마약과 진화론

많은 사람들은 진화론이 마약의 복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주 서부의 한 남자에게서 온 다음의 고백 편지는 그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학교에서 진화론은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을 누구도 의심조차 하지 못하도록 제시되었습니다. 제 학교는 말로는 기독교 학교였지만 창조의 성서적 설명은 하나님과 사람, 우주에 대한 글자 그대로의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닌 일종의 낭만적인 소설 정도로 소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성경이 비과학적이고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진화론이 단지 가정- 누군가의 머리에서 꾸며진 개념 -이란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으고, 제가 스스로 소위 “사실”들을 확인할 만큼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저는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학교를 떠난 뒤, 저는 어린 시절 주어들은 가정과 전제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진화론에 관한 제 단순한 믿음은 세 가지 중요한 실제적 결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 그 믿음은 즐거움과 창조력의 최종적인 원천으로서 마약에 눈을 돌리도록 저를 강하게 부추겼습니다.

2.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위에 정말 계시다면, 그 분은 매우 소원하고 비인간적인 인물이며 엄청난 거리의 시간과 공간에 의해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습니다.

3. 인간을 시간과 물질, 우연의 무작위적 부산물로 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그들이 비롯되다고 생각되는 동물이나, 나무, 바위들과 다르지 않으므로 남자와 여자를 존귀와 존경의 대상물로 취급해야할 아무 논리적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저는 제가 집에서 가르침 받았던 도덕적 가치들을 점점 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단지 한 가지, 제가 진화론이 사실이라는 것에 확신한 결과로 마약에 대해 가졌던 큰 믿음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싶습니다. 학교를 떠난 뒤, 저는 점점 더 마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칙적으로 마약은 제가 인간의 기원과 자연에 대해 배운 것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마약 복용은 이치에 맞는 듯이 보였습니다. ‘화학적 반응으로부터 네가 왔고, 화학 물질로 너는 돌아가리라.” 그리고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즐거움과 창조력의 원천으로서의 마약에 대한 제 믿음은 직장과 인격,인간 관계가 산산조각 나버린, 완전히 황폐한 상태로 10년을 보낸 후에도 거의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온 후에도, 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에 열거된 바와 같은 인간의 본성, 기원과 운명에 대한 진리를 지적해주기 전까지는 마약을 계속해서 사용했고 마약에 대단히 끌렸습니다. 제가 이 진리를 이해하고 났을 때에야 마약에 대한 제 개인적인 사랑이 완전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제 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 단지 그 분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제 단지 상투적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자유로우며 저를 자유롭게 한 것은 진리였습니다 - 심지어 마약에 대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제가 거짓 - 진화론의 거짓을 믿음으로써 한 때 화학물질에 가졌던 강요된 믿음으로부터의 자유. 저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제가 행했던 증거를 다시 살펴보시기를 호소합니다.”

4. 낙태와 진화론

많은 사람이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발달할 때, 인간이 되기 전까지 아가미 구멍 등을 가진 물고기 단계와 다른 진화론적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개념은 태아가 발달하면서 자신의 선조를 반영하는 모든 진화론적 단계를 거친다는 뜻이다. “태아의 발생 반복설”이라는 이 이론은 언스트 해켈이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지만, 이 이론 전체가 의도적인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그리 많은 사람이 알지는 못하고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하지만 자신의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서 해켈이 도안을 만들면서 일련의 부정직한 왜곡에 의지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해켈은 자신이 가한 변조를 언급하지 않고 일부 그림의 본래 출처를 언급했기 때문에 부정직하다고 이름 붙이는 일은 그리 가혹한 것이 아니다.” (창조과학 연구회 1969 연감, 6권 1호, 1969 6월 p28).

결국 언스트 해켈은 이런 사기를 인정했지만 한심한 일은 이 이론이 세계적으로 많은 대학과 학교에서 여전히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틀림없이, 최근의 기록을 가지고 앞서가는 진화론자들은 이 견해가 그릇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수업에서 가르치는 일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기있는 학교 교과서들과 독서물에서는 이 견해가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종종 매우 교묘하게 보급되고 있다.

어머니 자궁에서 발달하고 있는 아이가 단지 진화론적 선조를 반영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 받아들여지면서 아이를 죽이는 일은 점점 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화론적 개념이 더욱 받아들여지면서, 낙태를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쉬워졌다. 사실, 미국의 일부 낙태 클리닉은 여성을 한 쪽으로 데려가서 낙태되는 것은 단지 진화의 물고기 단계에 있는 태아이며 그 태아를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설명한다. 여성들을 노골적인 거짓말로 달래고 있는 것이다.

다윈이 자신의 진화론을 대중화시키기 전에 낙태가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말한다. 그러나 그의 진화론은 낙태의 체면을 살려주었으며 따라서 오늘날과 같이 낙태의 엄청난 증가를 가져왔다.

5. 사업 방식과 진화론

19세기 후반에는 “사회적 진화론”으로 알려진 철학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 철학은 당시 많은 기업계 거물들의 사고를 지배했다. 그들은 진화론이 생물권에서 들어 맞기 때문에 같은 방법이 사업의 세계에도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적자생존, 약자 제거, 가난한 사람에 대한 무자비.

1985년에 호주의 대형 은행 중 하나인 국립 호주 은행은 다른 은행과의 합병과 관련한 기념 잡지에서 그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자 생존의 다윈적 원칙을 사용하고 있다. 역사책에는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사업 영역에 이를 적용시킨 유명한 사업가들의 많은 예가 있다.

6. 남성 우월주의와 진화론

사회의 상당수 남성들의 우월주의적 태도로 인해 기독교를 비난하려 드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성경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며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지 않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방법과 뱀의 유혹에 대한 그들의 반응 때문에 다른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고 가르친다(딤전 2:12-14). 뉴 사이언티스트지(100권, 12얼 22/29, 1983, p887)에서 이블린 리차드는 말한다: “여성이 참정권과 고등교육, 중산층 직업으로의 진입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있는 시대에 여성이 남성을 결코 앞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위안이 된다; 이 새로운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이를 보장하고 있다.” 그녀는 그 글에서 계속해서 말한다: “. . . 진화론적 재구성은 공격적이고 지역적이며 사냥하는 수컷을 중심에 위치시키고 암컷은 복종적인 가사와 진화론적 과정의 주변으로 격하시킨다.” 다시 말하면 일부 사람들은 여성이 열등하다는 사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윈의 진화론을 사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주의 운동에는 여성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진화론을 통해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진화론을 가지고 아이들의 권리를 정당화시키려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 남자나 여자의 우월함을 정당화시키는 이론은 어느 쪽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급진적인 여성주의 운동에 진화론적 철학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그러한 운동에 기만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죄악의 상당수가 진화론적 철학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로 인해 정당화된다는 사실을 가지고 책 한 권 전체를 쓸 수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내게 묻기 시작한다. “오늘날 사회의 모든 죄악을 진화론에 돌리고 계신 겁니까?” 내 대답은 “예 그리고 아닙니다.” 아니오 - 왜냐하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우선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창조의 하나님을 거절하고 따라서 그분의 규율을 거절하면, 그리스도인 윤리를 버리고 스스로의 의견과 합치되는 믿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예 - 아주 현실적인 측면에서 사람들이 창조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일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소위 진화론의 “과학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오늘날 신성한 창조에 대한 믿음을 거절하는 일을 정당화시키는 주요 요인이다.

다음의 삽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모두를 멋지게 요약한다.

왼쪽에서 우리는 진화론이란 기반을 본다. 그 위에 세워진 성은 “인본주의”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우리가 토론한 주제들은 인본주의 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우리는 창조론이라는 기반을 보게 되며 그 위에는 “기독교”라고 이름 붙여진 성이 세워져 있다. 그 기반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건축물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독교 건축물 위에서 대포는 서로를 겨냥하던지, 아무 곳도 겨냥하지 않거나, 인본주의의 문제들을 겨냥하고 있지만 분명히 진화론이라 불리는 기반은 겨냥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전쟁을 하고 있지만 어디와 싸워야 할 지, 어떻게 총을 겨눠야 할 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진정한 문제이다. 인본주의란 건축물이 붕괴되기는 것을 보고 싶다면(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우리는 대포를 진화론이란 기반으로 재조준해야만 한다. 기반이 무너져야만 건축물이 붕괴될 것이다.

대포 하나가 풍선으로 나타내진 인본주의의 문제를 터뜨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주의깊게 고려해야할 다른 측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낙태나, 성적 부도덕, 도색 문화 등등과 싸우는 일에는 동의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문제만을 공격하고 그 문제들의 동기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공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 사회에서 낙태를 금지하도록 법이 바뀌더라도 낙태가 받아들여지는 원인(진화론)을 공격하고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는 진화론에 의해 훨씬 더 많이 순응해서 그냥 그 법을 다시 바꿀 것이다. 교회는 낙태나 도색문화, 동성애에 관한 사회의 태도를 바꾸는 일에 성공하기 원한다면 이런 문제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싸워야만 한다. 진화론의 근본적인 기반이 파괴되고 창조론의 근본적인 기반이 본래의 중요하고 적합한 위치로 회복되야할 필요가 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다른 방법으로 요약한 것이 다음 삽화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표면에 “SS 창조론”이라고 쓰여진 “기독교”라는 배가 “인본주의” 잠수함의 “진화론”이라는 어뢰에 의해 구멍이 난 것을 볼 수 있다. “기독교”라는 배를 주목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은 주위를 돌아보면서 왜 배가 가라앉고 있는 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열심히 물을 퍼내고 있지만 사실상 물을 퍼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배는 가라앉고 있다. 그들의 잘못은 그 공격의 파괴적 속성을 깨닫지 못하는 일에 있다 - 배의 “기반”이 격추되어 조각나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전쟁은 고조되고 있다. 우리는 왕의 군병들이다. 밖에서 왕 중 왕이시요 주의 주이신 분을 위해 싸우는 일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왕의 군대다. 하지만 우리가 올바른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가? 정말 중요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군사적으로 본다면 완전히 어리석은 전술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전쟁이 고조된 곳에서 싸우지 않고 있다. 그들은 진짜 전장에서 싸우지 않고 있다. 이길 희망은 없다. 우리가 무기를 재조준하고 창조의 기반을 회복시킴으로써 진화의 문제를 공격적이고 능동적으로 싸울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세계 각 나라의 그리스도인이 언제야 깨달을 것인가?

서구 국가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진화론과 타협하고 있다. 많은 신학교와 성경학교는 창조와 진화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창세기를 굳이 문자적으로 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진화론과 성경 모두를 믿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타협적인 입장은 그들이 사회에 남아있게 되기 원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건축물 - 기독교란 건축물 - 을 파괴하는 일을 돕고 있다. 10장은 교회에서 목회와 가르치는 위치와 관련된 모든 분들이 창조의 하나님을 위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따라서 우리 국가를 파괴시키고 있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철학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