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10 장

깨어라, 목자들이여!

창조과학 사업에 관한 많은 반대가 교회 안에서, 특별히 진화론과 타협한 사람과 자유 신학을 고수하는 사람에게서 오고 있다. 먼저, 내가 진화론과 성경사이에서 타협한 사람들을 너무 심하게 공격하는 듯이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관련된 진정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과학자들이 진화론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증명했다고 실제로 믿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단절 이론, 점진적 창조론과 같은 견해에 대한 믿음은 다는 아니더라도 과학자들이 진화론의 많은 측면을 증명했다는 믿음에서 온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은 진화론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를 많이 수행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앞에서 말한 타협을 고수하는 일은 가정된 “사실들”의 혼란스러운 배열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어느 세미나에서 한 여성이, 진화론이 성경에 관한 그녀의 믿음을 무너뜨렸노라고 내게 말했다. 그녀는 삶에 공허함을 느꼈고 주님께 부르짖었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해답을 위해 기도했다. 그녀는 성경을 신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어느 도서관으로 이끌려갔고 단절 이론에 관한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단절 이론은 기본적으로 창세기 1:1절과 1:2절 사이에 수십 억 년을 인정한다.) 그녀는 이 해석에 감동했고 그리스도인 삶을 다시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세미나가 끝나자 그녀는 내게 와서, 그녀가 단절 이론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적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진화론이 야기시킨 상황에서 그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단절 이론을 사용하셨다고 말했다. 이제 그녀는 성경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

과거 세대에는 많은 위대한 그리스도인 남녀들이 단절 이론이나 유신론적 진화론을 장려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진화론적 과학 연구의 참된 본질을 보일 수 있으며 모든 분야에서 성경을 뒷받침하는 힘있는 증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타협적 견해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견해를 버리고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야고보서 3장 1절을 경고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창조와 진화의 문제에 관한 그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라고 호소한다. 앞서 말한 한 예는 어느 학교에 대한 방문과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복음 기별에 마음문을 열었던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나는 그 학교의 한 어린 학생의 간증을 들었었다. 내가 언급하지 않았던 일 중 하나는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가는 일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두 목사의 악의 넘치는 방해였다. 이유? 그들은 내가 학생들을 혼란스럽게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내게 없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노력이 성공했다면 그런 많은 학생들이 지금 복음에 대해 마음문을 열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학교에서는 지역 목사님들 중 한 분이 창조과학 팀이 일부 수업에서 시간을 쓸 수 있도록 특별한 허가를 받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치셨다. 다른 지역 목사는 학교에 와서 우리가 말하고 난 뒤에 말할 권리를 요구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며 신앙심 깊은 목사라고 말했으며 그리고 나서 우리가 말하는 바를 믿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는 자신이 진화론을 믿으며 창세기가 참되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창조과학 사업의 연사로서의 경험 동안 그런 일이 수없이 일어났다. 계속해서 목사들은 우리가 단지 학생들을 혼란시킬 뿐이며 따라서 학교에 가도록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목사들은 학생들이 하나님은 없으며 만물(인간을 포함해서)이 무작위적 우연의 산물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기별은 단순하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며, 그 분이 창조주시고, 성경은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돌보는 목사가 되어야할 사람들이 학생들이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듣기를 더 바라는가? 그러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순례에 아무런 믿음이 없다. 어떻게 그들이 목양하기를 희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실제로 학교를 방문해서 학생들에게 진화론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만 한다.

호주 타즈매니아에 있는 한 교회 학교의 공적인 입장은 진화론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거기에 더하는 것이었다. 지역 주교는 내가 그 학교를 방문하는 것을 총력을 다해 막으려 들었지만 선생님 중 한 분이 창조론적 견해를 반에서 제시하도록 허가를 받았고 그 선생님은 나를 특별 연사로 초청했다. 내 발표가 끝나자, 70명의 소녀 중 69명이 나를 둘러싸고 창조에 관한 내 입장을 말로 공격했다. 그들은 이런 말을 외쳐댔다: “하나님은 없어요!” “불교가 기독교보다 나아요!” “진화론은 사실이에요!” “당신은 성경을 신뢰해서는 안돼요!” “성경은 오류로 차 있어요!” “우리는 당신이 말해야만 하는 바에 관심 없어요!” 진화론과의 타협 때문에 그들은 공립 학교 학생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마음문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 학교에 다녔다. 왜 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할까? 그들이 아는 한, 학생들은 모든 해답을 이미 갖고 있었다. 하지만, 한 소녀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왔다. 그녀는 그녀의 믿음에 주어진 기반에 대해 내게 감사했다. 그녀는 자신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며 선생님들이 기독교에 관한 그녀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 특정 학교에 있는 것이 매우 힘들다고 말했다. 그들은 분명히 그 학급의 다른 많은 소녀들의 신앙을 약화시켰다.

어느 교회에서 질문 시간 동안, 목사님이 중요한 질문을 했다. 그 지역에 창조론적 관점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학교가 없기 때문에 부모들이 아이들을 반기독교적 철학으로 알려진 지역 공립 학교로 보내야 하는가, 아니면 타협하는 그리스도인 학교로 보내야 하는가? 회중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적막이 흘렀다.

내 대답? 자녀를 진화론과 타협하고 세속적인 철학만을 가르치는 교회학교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지역 공립 학교로 보낼 것인가? 내 첫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어느 쪽으로도 보내지 않겠습니다 - 집에 두겠습니다!” 물론, 이 대답은 오늘날 많은 부모들에게 현실적인 선택이며 가정 학교 운동은 자라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공립학교에서 반기독교적 철학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게 말하기가 더 쉬웠다고 덧붙였다. 말로는 기독교 학교이면서 세속적 철학과 타협한 교회 학교는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점 외에는 공립 학교와 다를 바가 없다.

주님께서는 계시록 3:15-16절에서 이를 명확히 하신다. 타협하는 교회에 대해 우리는 읽게 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아마 이 때문에 우리가 종종 타협하는 기독교 학교에서보다 공립 학교에서 우리의 사업에 대해 훨씬 더 나은 반응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

목사! 신학자! 성직자들이여! 진화론이 학생들의 마음에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학교 기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학생들이 줄고 있다. 학교의 종교 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들이 줄어들고 있다. 많은 학교에서 종교 교육 수업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있다. 현실적으로 바라보라. 당신의 타협적 위치가 효과가 있는가? 아니다!

1984년 5월 16일 호주 라디오에서 통합교회 목사요 서호주 대학 킹스우드 칼리지 학장인 콜린 허니 목사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반대의 일부를 볼 수 있다. 허니 목사는 기독교와 어리석음 사이의 근본적인 혼란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답했다. “만약 성경이 세계가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바보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혼란이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몇몇 신학교나 성경학교에 편지를 써서 창조에 대해 그들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묻는다면 당신은 충격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 - 단순히 창조를 가르치는지 묻지 말라. 창세기에 대해 무엇을 믿는가 물어보라. 창세기의 날들이 실제적이 날들이었다고 믿는가? 노아홍수가 크기에서 세계적이었다고 믿는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취하는가? 교리에 있어서 창세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가? 나는 때때로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특정 교단의 신학교가 진화론을 가르치거나 또는 창세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충격으로 쓰러질 정도가 된다. 그들은 신학교들이 성경이 진리라고 가르친다고 믿어왔다. 서구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대부분의 신학교와 성경학교들이 성경을 받아들이기 보다 질문하도록 훈련된 목사들을 배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양을 그릇 인도하는 수많은 목자들이 교회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있다면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냐고 왜 묻지 않는가?

한 세미나에서 어느 개신교 교단에서 온 세 명의 목사가 내게 다가 왔다. 그들은 내가 성경을 왜곡시켜 가르친다고 말했다.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가 성경에 대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접근 방식으로부터 논쟁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첫 번째 여자를 어떻게 만드셨냐고 물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 - 이 사실을 믿는가? 그들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예, 우리는 거기에 내포된, 남자와 여자가 하나라는 상징적 의미를 믿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아니요. 저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여자를 만드신 방법을 믿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 신학적 묘사가 남자와 여자가 하나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 확실히 동의한다고 말했다. 나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러한 방법으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내 질문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신약의 고전 11:8에서도 우리는 바울이 여자가 남자에게 왔으며 남자가 여자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창세기에 있는 역사적인 창조의 설명을 분명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을 읽게 된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들에게 신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말했다. “오, 물론이지요. 우리는 그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자 나는 그들에게 왜 하나님께서 실제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창세기를 시로 받아들이는 것과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창세기가 시라면 믿어서는 안된다고 제안했다.

물론 창세기는 역사다. 게다가, 성경의 다른 부분이 실제 그런 것처럼 무언가 시의 형태로 쓰여졌다 해도 그것이 믿지 말라는 뜻인가?

그들은 내게 성경의 상당 부분에 있어서 말해진 바가 아니라 내포된 신학적 묘사가 중요하다가 알려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 신학적 묘사가 무엇이며 어떤 기반에 근거해서 참된 신학적 묘사를 결정하며 성경에 대한 그들의 접근 방식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역사와 신학에 관한 수십 년간의 연구를 통해 성경을 접근하고 그러한 상징적 묘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이 단순히 성경 접근 방식에 관한 한 의견을 고수하고 있는 듯이 들린다고 말했다. 그것이 올바른 의견이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기에서 대화는 갑자기 끝났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진리가 무엇인지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보다 무엇을 말씀하셔야 하는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원하고 있다. 이 것이 많은 신학 지도자들의 입장이다.

호주 빅토리아 주의 어느 교회에서 내가 말하고 나자, 지역 목사님 중 한 분이(분명히 당황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경에 대한 나의 해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아주 높였고 격앙되어 있었다. 내가 놀랍게 여긴 한 가지는 그 목사가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나와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측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사람들을 그릇 인도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견책하시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아는 진리를 선포하지 않고 있는 선생들과 제사장들에 대해 이스라엘을 경고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공공연히 견책하셨으며 “독사”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셨다(마 12:34).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을 옆길로 떨어지게 하는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같은 경고가 적용된다. 여러 분 중 상당수는 세계적으로 보급된 창조과학 기관들의 사업에 대한 반대 중 상당부분이 신학교와 다른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인본주의 그룹들은 흔히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의 협력을 받아서 창조과학 사업과 싸우기 위한 노력으로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출판물에서 그들을 지지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면서 성경과 창조론을 반대하는 누군가를 프로그램에 모실 수 있다는 사실에 흥겨워하는 텔레비젼 기자나 라디오 아나운서를 보아왔다.

창조론 대 진화론 논쟁에서 한 진화론자가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는지 아닌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를 믿으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고 계속해서 성경과 기독교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질의시간에 한 청중이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증언할 수 있냐고 물었다. 진화론자인 그 토의자는 무방비상태였고 분명히 그 질문을 피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이 남들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성경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근본적인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근본적 기독교를 성경을 사실로 인정하는 믿음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가 공중 앞에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양을 그릇 인도하는 양의 옷을 입은 늑대가 거기에 있었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목자들이 다음에 나온 “관용”에서 “오류에 대한 항복”에 이르는 발달 과정의 한 무리에 속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관용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화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포용하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그들이 말하는 바에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는 과학자들이 우리 앞에 내놓는 모든 대안들을 고려하고, 한 가지 견해에 대해 독단적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물론, 이 주장은 일종의 독단이며, 진화론적 철학을 배제하기 위해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많은 신학교들은 학생들이 창세기의 해석에 관한 모든 견해를 고려해야만 한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예를 들면, 유신론적 진화론, 점진적 창조, 하루-시대 이론, 단절 이론, 6일간의 문자적 창조론), 나아가서는 누구도 어떤 견해가 명확히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학교의 학생들이 다른 견해에 대해 무지해야 된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견해의 오류들은 상세히 지적되야만 한다.

2.수용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의 의미나 말하는 바에 대해 확신할 수 없으며 결국 진화론자들이 옳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학계”를 너무 존경하고 진화론을 후원하는 많은 수의 과학자들이 내놓는 엄청난 양의 자료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진화론을 그냥 성경에 더해 버린다.

3.타협

진화론의 잘못이 포용되고 진화론이 교회에 설자리가 여기에 주어진다. 대단한 조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타협은 편안한 입장이 된다 : 교회 안에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위협을 느끼지 않으며 모두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진화론을 통해서 일하셨다 해도 실제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4.오염

사람들이 진화론적 오류에 아주 깊이 관여하면서, 이 이론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세속적인 학교 수업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와, 주일학교, 기독교 학교, 및 종교 교육 프로그램에서 가르쳐 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는 사람들을 더 이상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5.오류에 대한 항복

진화론은 사실로 받아들여지며 감히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이단자”가 된다. 사람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창세기를 전설이나 우화로 격하시키면서, 성경의 나머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창세기에 담겨있는 모든 교리에 대한 기초를 거절하는 것은 당연히 성경 전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자유 신학이 만연하고 있다.

라 트로브 대학 생물학부에서 유전학과 인간 변종에 대해 가르치는 한 교수의 반응을 적어두는 일은 재미있었다. 게리 파커 박사와 토론하는 도중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관련해 질문을 받자, 그는 말했다: “저는 기독교가 꽤 넓은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덧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기독교는 진화의 다양한 과정 속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일부는 거의 신학 없이 나아가는 듯 합니다. 기독교 진화의 최종 단계는 모든 신학을 떨쳐 버리고 완전히 합리적이며 자연적인 방식의 인생관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인식했던 것은 무신론적 진화론과 유신론적 진화론 사이에 실제로 아무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 후자가 하나님을 그 학설에 더했다는 사실을 뺀다면.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유신론적 진화론은 무신론적 진화론에서 단지 한 걸음 떨어진 것에 불과하며 그 교수는 거기에서 그러한 타협적 위치의 최종 결말을 본 것이다.

많은 교단이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해 대단한 논쟁과 많은 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토론할 때, 슬프게도 많은 복음주의적 학자들이 창세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고의적으로 회피한다. 창세기에 나온 글자 그대로의 사건을 받아들이는 일은 성경의 무오류성 문제에 근본적인 것이다. 무오류성에 대한 협의회가 먼저 그 문제의 틀을 잡는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문제들은 아주 신속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학교나, 기관, 교회나 그러한 협의회를 위해 공식적으로 나타내는 신조가 창세기에 대해 아주 구체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진화론을 완전히 거부하는 일, 성경 나머지에 대한 창세기의 근본적 속성을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과 적합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많은 기독교 학교 운동에도 이런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나는 창조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무엇을 믿고 이해하는 가보다 종말론(재림)에 관한 선생님의 견해에 더 관심을 갖는 기독교 학교들을 알고 있다. 이는 그들이 기독교 교육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4:14).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양을 잘못 인도하는 많은 목자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5:31) 양도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저자의 강조) 각 나라에서 더 많은 남녀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절대적인 진리를 위해 서는 일에 준비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출 20:11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어느 기독교 학교 수업에서 한 아이가 선생님께 물었다. “아무라도 6일 동안에 무에서 만물을 창조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매우 총명한 다른 학생이 불쑥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냥 아무나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