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안식일이다. 중동연합회가 대중동연합회로 바뀌고 처음있는 연례회의 때문에 많은 손님들이 레바논을 방문중이다. 대표들도 부쩍 늘었다. 기존의 중동지역에 더하여 이란과 터키 그리고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 같은 북아프리카에서도 손님들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지회 대신 대총회에서 많은 분들이 오신다. 손님들이 많기 때문에 연합회에서는 대표들을 각 가정에 배정하여 안식일 점심을 대접하기로 결정했다. 우리와 함께 동료선교사 가정에 배정된 분들은 대총회 수석총무와 부재무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집에서는 김밥을 싸가지고 갔는 데 두 분다 '스시'라고 안하시고 또렷하게 '김밥'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알고보니 수석총무란 분은 남아태 지회가 있는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봉사...하 셨을 때 가끔 한국음식을 맛보신 데다가, 2010년 북아태지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고 하셨고, 부재무란 분과 이야기를 해보니, 이 분의 아버님이 한국에서 선교사셨다고 하셨다. 흥미가 생겨서 계속 물어봤더니 아버님께서 1960, 70년대에 위생병원 치과의사로 십구년간을 봉사하셨단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류제한 박사님의 가족과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도 한국에서 태어나셨다고 하셨다. 그때문인지 우리가 가지고 간 매운 김치와 김치볶음밥을 정말이지 맛있게 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건 매운것도 아니라고 하신다. 한글도 곧 잘 읽으신다. 그리고 어린 시절 한국에서의 추억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셨다.

 

그런데 정말이지 문득,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대신 엉뚱한 질문이 하고 싶어졌다. "한국사람들은 협조적이었습니까?" "게으르지 않았습니까?" "정직했습니까?" "아버님이 한국사람들 때문에 가끔 괴로워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왜인지 선교지의 '한국사람들'이 어떠했는지를 나는 몹시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집요하게 물었다. 왜였을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이곳 사람들이 나같은 한국 사람과는 철저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의 문화와 그들의 문화는 어쩌면 정 반대의 극단에 서있다고 느꼈고 믿었다. 때문에 종종 막연하고 어지러웠다. 가끔은 부적절한 사람을 이곳에 보낸 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언제부터인지는 말하기 힘들지만, 지워질 것 같지 않던 두 문화의 날카로운 경계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문화의 비슷한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젓가락 두짝과 같이 '똑같은'것도 많았다. 어이없게도 '우린 알고 보면 그리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마저 들지경이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짚고 넘어가야 했다. 검증해야 했다. 제3자가 시선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내가 틀렸음을 혹은 맞았음을 한국에서 봉사했던 선교사의 아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선교지의 한국인들이 내가 섬기는 중동의 아랍인들과 비슷했고, 그들도 내가 머무는 선교지의 사람들과 비슷한 고민거리를 선교사에게 안겨 주었다면 나는 틀린 것이 아닐것이다. 어쩌면 두문화가 유사하다는 나의 느낌은 정확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김치를 잘 먹는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에게 선교지 한국의 한국인들에 대하여 묻고 싶었던 것이다.

 

"아뇨, 좋은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가족 모두 한국인 친구들을 사랑했고, 제 부모님들이 말씀하시길 제 한국어가 그분들 보다 훨씬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 싱거운 대답을 듣자마자, 나의 시도가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단 비교대상이 틀렸다. 선교사 자녀의 경험을 현재 선교사인 나의 경험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 아버지의 세세한 고민을 알 수 있었을까? 하지만 혼란 스러운 것은 그들이 19 년간을 한국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긴 시간을 머물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비교해야 한다면 훗날 선교사 자녀인 준용이가 이야기하는 중동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또 다른 선교사 자녀들이 느꼈던 '한국인'들이 그 비교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마 아들 준용이가 클 때까지 그 대답듣기를 유보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꿈꾼다. 이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성장해서 수많은 중동출신의 선교사들이 나오기를... 그러면 아주 우연히 정말 우연히 수많은 아랍인 선교사들 중 한 명이 먼 훗날 준용이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준용이가 그 집에 초대될 수도 있겠지. 녀석, 익숙하게 오른 손으로 아라비아 빵을 찍어서 홈무스에 찍어먹고 맛있다고 좋아하겠지. 음식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걸 아니까 적절하게 조절도 할 수 있을거야. 자연스럽게 아버지 어머니가 레바논에서 선교사였었다고 말문을 열거야.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겠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 퀘퀘한 게스트룸이며, 아버지가 국경수비대와 티격태격하던 시리아 국경이며, 요르단 술탄 삼촌네서 머물렀던 경험이며, 레바논의 언덕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본 멋진 노을이며, 학교의 라일라 선생님이 얼마나 친절하셨었는지, 찢어질듯한 자동차 소음가운데 먹던 아보카도 주스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비행기를 그릴 때마다 꼭 레바논 국기와 태극기를 동시에 그려넣고 레바논 애국가를 부를 정도로 레바논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며... 그렇게 추억이 한창일때, 우연히도 정말 우연히도 그 아랍인 선교사가 준용이한테 물어볼수도 있을거야. "중동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아버님이 중동사람들 때문에 가끔 괴로워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뇨 좋은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가족 모두 중동 친구들을 사랑했고, 제 부모님들이 말씀하시길 제 아랍어가 그분들 보다 훨씬 낫다고 하셨습니다."

 

[위의 글은 레바논에서 섬기는 정찬민 목사님께서 보내오신 글입니다. 레바논에서 영원한 복음에 접속하는 데 문제가 있어 글을 관리자에게 보내왔습니다. 때로 기독교에 대해서 예민한 나라에서 외국의 종교적인 웹사이트 접속을 제한하는 곳들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