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80
2009.03.19 10:19:18 (*.94.254.57)
십계명 중 두번째 계명인 우상숭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다른 신을 믿는 다는 것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구세주로 받아드리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만이 우리가 구속의 경륜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겐 마지막날 영생이 아닌 불을 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우리의 창조주 예수를 기억하고 섬겨야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심판을 하신 것은 우리가 그 본보기를 보고 실수를 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심판을 당했더라면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이라도 회개를 통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세상사에 젖어 득과 실을 쫓아 다니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길을 따라 가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져야합니다. 우리는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인도자를 따라 가야합니다. 그것 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길인 것입니다.
또한 세상사에 젖어 득과 실을 쫓아 다니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하나님이 정해주신 길,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길을 따라 가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져야합니다. 우리는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인도자를 따라 가야합니다. 그것 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길인 것입니다.
2009.03.19 14:37:57 (*.129.251.240)
목회 실습 1
유재덕
고라의 반역으로 하나님께서는 땅을 열어 그들을 삼키신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 후 백성의 반응이 의아하다.. 그들은 의로운 고라를 죽였다고 비난 하는데 그것이 이해가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갈수 없다는 포고를 들은 다음 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 세상에서의 모든 기쁨을 혹은 현세의 가나안을 모두 잃어버린다는 포고를 듣고도 재림 교인으로서 하늘의 선민으로서 남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세상으로(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모세를 보라.. 가나안에 들어 갈수 없다는 선언 마저도 순종하는 그 모습을 닮겠다.
유재덕
고라의 반역으로 하나님께서는 땅을 열어 그들을 삼키신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 후 백성의 반응이 의아하다.. 그들은 의로운 고라를 죽였다고 비난 하는데 그것이 이해가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갈수 없다는 포고를 들은 다음 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 세상에서의 모든 기쁨을 혹은 현세의 가나안을 모두 잃어버린다는 포고를 듣고도 재림 교인으로서 하늘의 선민으로서 남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세상으로(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모세를 보라.. 가나안에 들어 갈수 없다는 선언 마저도 순종하는 그 모습을 닮겠다.
2009.04.05 10:08:08 (*.164.161.197)
사람은 이기적인 죄된 본성을 타고났기때문에 어떠한 일이 잘못되거나 안좋은쪽으로 흘러가면 자기를 합리화 시키면서 남에게 탓을 돌리기 마련이다.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내 자신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은일이 일어 났을때 나자신을 합리화 시키면서 위로를 하고 있지 않은지. 어떠한 일이 일어나던지, 남을 먼저 생각하고, 불평하지 않고 내자신을 다시 성찰할수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고라 무리들과 같이 될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는 모습이 굉장히 무서웠다. 한순간에 그들을 심판하고, 벌주는것, 땅이 열려 그들의 물건과 그들의 모든것을 삼키는것. 참 무서운 광경인것 같다.
내자신의 인품을 예수님의 돌아가심을 통해 연결된 하나님을 만날수 있음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내인품을 더욱더 성숙시켜야 겠다.
간호학과2008611016 문조영
내자신의 인품을 예수님의 돌아가심을 통해 연결된 하나님을 만날수 있음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내인품을 더욱더 성숙시켜야 겠다.
간호학과2008611016 문조영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엎드려라
민수기 16장에서 모세와 아론의 특이한 행동을 보게 된다. 바로 땅에 엎드리는 것이다. 본문에는 다른 부가적인 설명이 없이 이 표현만 나오지만 영감의 글에는 이 모습을 죄를 범한 백성을 위하여 중보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행동은 백성가운데 염병이 돌기 시작하자 아론이 향로를 가지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게 되고 그제야 염병이 그친다. 이 두 행동을 통해 나의 목회철학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매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매일 중보기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의 사명은 나 자신만의 구원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신 목회의 사명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삶이 목회의 삶인 것을 본문을 통해 보여준다.
두 번째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는 것이다. 목회는 무엇인가? 매일같이 책상 앞에만 앉아서 연구하고 설교만 준비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목회의 삶은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아니 어쩌면 하루 24시간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서 있어야 한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24시간을 바치는 목자와 같은 삶이 바로 그 것이다. 목자는 양떼를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다른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른 아침 양떼를 위하여 양의 문을 열고 양떼 앞에 서서 양떼를 이끌고 좋은 풀을 찾아 같이 여행하고, 먹이고, 혹 들짐승이 양떼를 해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항상 양떼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양떼 가운데 머물면서 양떼를 돌본다. 이것이 바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선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구원은 매일 죽은 자와 산 자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매일 '아직'과 '이미'의 긴장 가운데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있다. 이 사이에 서서 양떼와 함께 영원한 하늘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 바로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는 것일 것이며, 목자의 동거동락적 운명이다.
나의 목회적 삶이 모세와 아론의 삶처럼 꼴 지어지기를 매일 같이 바란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중보기도를 올리며 양떼 가운데 서서 항상 긴장을 놓지 않는 목자처럼 그렇게 헌신하는 목회적 삶을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