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M 3기 일본 마에바시교회 강현중 목사

 

  선교사 지원을 결심했던 명확한 때는 언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꿈을 가져 왔었다. 필리핀 1000명 선교사를 다녀온 뒤엔 언젠가 다시 가족과 함께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소망하고 있었다. 언제 어떤 형태로 내게 그러한 기회가 다가올지 몰랐는데 PMM에 대해 듣게 되면서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아내와 함께 선교사 나가는 것을 의논했을 때, 아내는 지금은 아니라며 자녀와 재정, 교육 등을 생각한다면 몇 해 더 기다려야만 할 것 같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아내의 생각과 달랐다. 결심하고 시도하면 문제점이 해결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만약 문제와 맞닥뜨리지 않고 결심을 미루게 되면 선교사에 대한 꿈이 잊힐 것만 같았다. 자문하고자 주변에 몇 군데 물어봐도 선교지가 영어권 나라이면 써먹을 데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본어는 써먹을 데도 없을 테고 한국 돌아오면 자녀가 멍청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겁을 주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도 나이가 40이 넘어가려 하고 있었고 더 늦어지면 선교사로 일하기가 어려워질지 모르니 한해라도 젊었을 때 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전국 청소년 야영회가 있어 참석하고 있는 동안 주제가로 불렀던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해외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더욱 기뻤던 것은 야영장에 있는 동안 아내로부터 "여보, 나도 선교사로 함께 가겠어요."라는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이 메시지를 보는 순간 매우 기뻤고 감사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음에서 오는 갈등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나는 하나님께 충성하면 생명과 면류관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또한 내 마음 한 편에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이 숨어 존재하고 있었다. 목회하고 있던 교회도 걱정이 되었다. 몇 해 돌보지도 않았는데 떠나는 것이 서운했고 교인들도 안타까워했다. 외국에 가서 열심히 선교하려는 각오로 한국에서 열심히 하면 더욱 성공적인 목회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러나 진정 죽음을 무릅쓰고 일하면 하나님께서 살리실 것이란 기별을 믿으며 또한 그런 선교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하는 산 경험을 체험하리라는 심정으로 가고 싶었다. 태풍과 지진이 많은 나라인 것을 더욱 실감하게 하는 최근 뉴스들을 대하면서 약간의 두려움도 엄습해 왔다. 1000명 선교사를 지원할 때도 말라리아 때문에 죽게 될지 모르니까 가지 말라고 하며 나의 발목을 잡아끄는 유혹도 있었지만 나는 무사히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며칠 전, 큰딸 예진이가 '일본에 가면 옥매트도 사용 못 하니까 춥잖아. 나 일본 안 갈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매트로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다면서 달래니 그제야 간다고 하여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빠를 따라가게 되는 세 자녀도 살면서 불편한 점들이 있겠지만 단련한 후에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또한 경험하게 하게 될 것이다. 일본이 복음화 되어가는 변화를 보게 되는 것과 동시에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삶을 경험하고 싶다. 우리의 인도자이신 하나님이 늘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 받으시길 기원하며 그분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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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에바시 교회 첫 침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