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아홉 번째 이야기 -  불우 청소년, 비행 청소년의 아버지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 열어줘
32년 동안 청소년지도 육성에 헌저한 공로를 세워

1997년 5월 28일 청암고등기술학교 설립자 겸 교장인 추상욱 장로가 불우 청소년 지도 육성 및 선도에 헌신한 공로로 법무부 추천을 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추 교장은 이로써 연속적으로 세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셈이 되었는데(1986년 전두환 대통령, 1989년 노태우 대통령, 1997년 김영삼 대통령). 이런 일은 아마도 대한민국 건국 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이것은 투철한 재림교인인 그의 개인적 영광일 뿐 아니라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이며, 한국 재림교단 전체의 영광이기도 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은 후에 이곳을 클릭하여  "권정행 목사의 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2003년 1월 25일 안식일 이야기 "기도로 산을 움직일 수 있는가? 대통령을 감동시킨 이야기"를 통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바란다.


현대판 요셉

추 교장의 생애는 요셉의 생애를 닮은 데가 많다. 둘 모두 꿈이 있었고, 17세에 집을 떠난 점이 우선 비슷하다. 둘 모두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지도적 위치에 섰다. 굴복할 경우,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을 결정적인 시험을 받은 점도 같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듯이, 추 교장도 성실하게 일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요셉이 육신적 양식의 기근에서 백성들을 구했다면, 추교장은 배움에 굶주린 사람들의 지적 배고품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 둘은 시련을 통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변모했는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그들의 생애를 통해서 명확하게 성취되었다. 요셉은 도단의 구덩이에서 출발하여 영광의 보좌에 올랐다. 추상욱 교장은 고아 아닌 고아로, 구두닦이로 시작하여 교장의 자리에 올랐다.

신앙으로 시련을 이기고

추 교장은 1941년 전남 목포에서 5형제 중 4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두 형을 여윈 그는 중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사탕과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면서 행상을 하시는 어머니를 도왔다.
그는 17세 때 서울로 무작정 상경, 천막생활과 고아원 생활을 하면서 구두주걱과 머리빗을 만들어 팔아 저축을 하며 향학에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돈이 아까워 하루를 수제비 한끼로 때우며 저축한 돈이 900원이 되었다. 그 때 "미국인의 양자가 되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사기꾼에게 속아 저축한 돈을 몽땅 다 날리고 말았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그는 빈 통장을 들고 울면서 한강대교 향했다. 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목포에서 저녁 완행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갈 때 꼬기꼬기 손수건에 돈을 싸서 손에 꼭 쥐어 주시면서 하신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참을 수 없는 것 참는 게 인내다." 그는 즉시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아들과 구두를 닦으면서 검정고시에 합격, 드디어 18세에 한영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한 육군 중령이 전해 준 오늘의 신앙 과목과 다니엘.요한계시록을 공부한 끝에 1976년 침례를 받고 재림교인이 되었다.
그러던 언젠가 미국의 재림교인들이 보내준 구호물자를 빼돌리는 고아원 원장에게 항의를 하다가 한 겨울에 길거리로 쫓겨났다. 밤을 의지하려고 고아원 밑에 있는 구두닦이들의 숙소를 찾아갔다가 담요에 씌운 채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 때 그의 비명소리를 듣고 고아원 원장 사모가 그를 뒷문으로 구출해 냈다. 사모님은 의식을 잃은 그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때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영하 7도의 날씨에 옷과 몸이 물에 다 젖은 채 정처없이 구두통을 메고 걷다가 지쳐서 길거리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는 새벽에 한 할아버지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낮에는 다방을 청소하고 주방장 노릇을 하면서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월급을 통 주지 않아 항의를 하다가 주인 아저씨와 아들에게 뭇매를 맞고 돈 한푼 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쫓겨났다. 다시 다른 다방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는 데 경찰이 그를 체포했다. 그가 전에 일하던 다방이 도둑에 몽땅 털렸는 데, 원한으로 깡패를 동원해서 저지른 그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죄없이 수갑을 찼다. 안식일도 철저히 지키고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데 믿음대로 살려고 하면 할 수록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배은 망덕과 수갑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책임져 달라고 열렬한 기도를 드렸다. 그는 어머니가 재림신자인 한 경찰관의 배려로 기적적으로 석방되었다.

구두 한 켤레와 운명의 시험

그는 다시 고아들과 함께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어느 날 사이즈가 대단히 큰 구두를 닦게 되었는데, 보통 구두 세 켤레 닦는 품이 드는 큰 구두였다. 그는 정정껏, 구두 밑바닥까지 청소해 주며 빛나게 닦아 주었다. 그 구두는 미국 기술인 연합회 대표이사인 클라우드 씨의 구두였다.
어느날 그가 그를 불렀다. 정성껏 구두를 닦아줘서 고맙다며, 저녁을 살테니 그의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을지로 6가에 있는 그의 숙소로 찾아갔다. 교실 한 칸 정도는 됨직한 큰 방이었다. 그 방의 냉장고에는 음료수와 초콜릿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가 잠시 방을 비웠을 때 방을 둘러보니 그가 닦은 구두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책상 서랍에는 그가 갖고 싶어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시계, 보석, 한국 돈 몇 다발, 달러 뭉치 등이 들어있었다. 견물생심이라고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양심에 투쟁이 시작되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그는 재림교인이 타인의 것을 도적질하여 하나님께 득죄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이 유혹을 이기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마음이 후련했다. 이젠 찬미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클라우드씨가 나타났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덥썩 끌어 안았다. 그는 밖에서 그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손목에 새 손목시계를 채워주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이튿날 통역관을 통해 기술을 배우기 원하는지 공부를 하기 원하는지 물었다.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저는 안식일을 지키고 싶습니다. 안식일 교회에서 운영하는 삼육고등학교에 다니게 해주십시오." 즉시 클라우드 씨는 그의 차에 그를 태우고 가서 한국삼육고등학교에 입학시켜 주었다. 그리고 기숙사에도 넣어주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도의 동산 오얏봉을 찾았다.

애덕(愛德) 잘살기 중학교 설립

1964년 삼육대학 신학과(기독교 교육학)에 입학한 그는 철거민으로 붐비던 가난한 마을 중계동에 전도차 나왔다가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을 위해 야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등록금으로 모아 두었던 3만원으로 마굿간을 빌려 17명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겨울은 너무 춥고 여름은 비가 새어 우산을 받쳐 들고 공부를 해야 했다. 소문을 듣고 학생들이 몰려들어 학생 수는 30명에서 60명 그리고 얼마 후에는 100명이 넘어섰다. 이제는 천막 1개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카네이션을 만들어 5월 8일 어머니 날에 팔아 그 수익금으로 냇가의 모래를 가지고 6월의 뙤약볕 아래서 비지땀을 흘리며 벽돌을 찍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장마비에 벽돌들이 다 떠내려가 버렸다. 그는 떠내려가는 벽돌을 보며 아이들과 함께 울기도 했다.
다시 추석이 되자 이번에는 국립묘지, 망우리 묘지 등에서 생화(生花)를 팔아 다시 벽돌을 찍었다. 냇가인지라 기초를 튼튼히 하고 석축을 쌓을 돌이 필요했다. 그는 불암산에서 지게로 돌을 져서 나르다 어느 날 이슬에 젖은 돌을 헛 딛어 큰 돌멩이 둘을 진채로 쓰러져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학생들이 몰려와 그의 입원실은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간신히 엉성하게나마 벽돌집을 짓기는 했으나 지붕이 없었다. 결정적인 때 다시 클라우드 씨가 나타났다. 자기가 도와준 고아가 큰 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달려왔다. 건축 공학자인 그는 주머니를 다 털어 지붕을 올리고, 창문의 유리를 끼고, 전기를 가설해 주었다. 석축도 쌓아 주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주변의 학교들이 무인가 학교라고 고발하여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 때 조사하던 경찰관이 대학생이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 철거민 자녀들, 구두닦이들을 붙들어서 교육시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감동을 받고, 경찰서장에게 이런 사람에게는 오히려 표창을 주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전 경찰이 학용품, 시험지를 긁어 모아 주어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그는 한국삼육학생들에게 호소하여 헌 교과서, 성경 찬미를 얻어다 가르쳤다. 침례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육영수 여사도 방문하여 격려하고 도서 300권을 기증해 주었다. 육사의 대민 지원 사업 혜택을 받아 152평에 정식 건물을 짓고 드디어 1971년 고등공민학교 인가를 받아 서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학교는 아침 조회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침을 거르는 학생들이 많아 조회 중에 쓰러지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수업 중에 쓰러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청암고등기술학교

1979년부터 청암고등공민학교 문을 닫고 기술학교를 세웠다. 그는 시대적 필요에 맞추어 대학 못가는 학생들과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칠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건축, 중장비, 전자과 인가를 받아 기능인을 양성했다. 학생들은 주야로 공부해 졸업생 전원이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청암 출신들은 성실하고 기술이 좋아 굴지의 기업체에서 청암 출신을 보내달라고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취업률은 100%이다.
지금까지 그가 길러낸 학생들은, 애덕 잘살기 중학교 480명, 청암고등공민학교 1,680명, 청암고등기술학교 3,500명 등 도합 5,700명에 달한다.
청암은 입학생 중 5%만이 재림교인이다. 안식일이면 각 반에서 안식일 학교가 진행된다. 매년 입학생의 90%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침레를 받는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산업의 역군으로, 각교회에서 신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청소년 선도 사업에 앞장서

그는 불우한 청소년을 위한 육영사업 외에 비행 청소년 선도 및 범죄 예방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1984년 이래 서울 지방검찰청 북부지청 소년 선도위원으로 위촉되어 일하고 있는 데, 지금까지 북부지청에 형사 입건된 비행 청소년 중 180명을 수탁받아 월 1회 이상 대상 청소년들을 방문하여 성심 성의껏 지도하고 격려해 왔다. 그의 그런 노력의 결과로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나 재범자도 발생치 않았다.
그는 선도(善導) 조건부로 유예 처분된 247명의 불우 청소년을 모아 주 10시간씩 6개월간 무료로 컴퓨터 및 전산 교육을 시켜 유명 오디오 회사에 취직시켜 자립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성동 구치소 교화 위원으로 위촉되어 1개월 1회 만남의 날에 청소년 재소자와 식사를 나누며 교화 사업을 해오고 있다.
"사랑의 눈물이 자녀를 사람되게 한다. 눈물의 아이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말을 잊지 않고 있는 추교장은 상습 도박을 일삼는 아버지와 언어 장애의 어머니를 둔 고2 폭력배를 여러 차례 설득, 손수레 사주고 장사밑천을 대주어 자활의 길을 열어주었고,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고, 어머니는 몸져누워 학업을 포기하려는 학생의 방세 등 생활비, 진료비, 학비를 대주어 교수로 키운 일 등 많은 비행 청소년과 불우 청소년들의 아버지와 보호자 역할, 후견인 역할을 남 모르게 해왔다. 또 소년소녀 가장들과 자매 결연을 맺어 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현재(1997년) 서울지방 검찰청 북부지청 청소년 선도위원 협의회장으로 범죄 예방 위원 430명을 통할`지휘하는 직임을 맡아 범죄 예방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참고 : 교회지남, 1997년 8월호. 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