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열 한 번째 이야기 - 적어도 성악계에서는 안식일 문제 해결

이 기사는 1998년 5월 1일자의 삼육대학교 소식 제 4호에 실린 글을 삼육대학교 음악교육과 류재광 교수의 허락을 받고 옮겨 실은 것임을 밝힙니다.

85년 가을, 이태리 땅에 도착했다. 내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꿈꾸어 왔던 성악의 본 고장 이태리. 그 땅을 지금 밟은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우리 집안의 경제 사정으로는 유학이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태리에 도학했다. 수도 없이 굶었다. 움직이면 배가 고파 방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이, 삼일ㅇ르 버틴 적도 많다. 돌아가려 해도 비행기 표 값이 없었다. 닥치는대로 일했다. 6년간.... 1년 배고프고 5년을 다른 유학생들보다도 풍족하게 벌며 유학할 수 있었다.

90년 귀국. 성악가의 최고 목표는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국립 오페라단, 시립 오페라단, 사립(한국, 서울, 국제, 아시아, 고려, 글로리아 등) 오페라단의 주역으로 계속 열연했다. KBS, MBC, SBS, EBS 등의 방송 출연 80여 회, 우리나라 전국의 크고 작은 예술 극장 무대 400여 회, 해외 10여 개국(20여 개 도시) 초청공연. 우리나라 10대 테너 중 한 명이라는 찬사와 함께 물밀 듯이 공연 요청이 들어왔다. 5년 동안 적어도 5개월 전에 예약이 끝났다.

그러나 96년, 이 모든 일들을 내가 이루어 낸 줄 알고 교만 속에 방심할 때 인생에서 가장 큰 흔들림으로 나와 내 주위 모두가 허물어졌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98년 정초, 국립 오페라단에서 통보가 왔다. "당신을 올해 국립 오페라  Don Carlo 주역으로  내정하였으며, 금요일(안식일) 저녁은 다른 캐스팅으로 대치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있고, 큰 연주는 대개 금요일(안식일) 저녁에 거행되었고 그 때마다 나는 주최측을 곤란하게 했다. 그러나 어느 직업에서나 겪게 되는 안식일 문제가 이제 적어도 성악계에서는 해결되었다. 우린나라 최고봉인 국립 오페라단에서 안식일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 내 한계와의 끝없는 도전, 내 평생 지고 가며 만들어야 할 소리의 영원한 숙제, 이런 단어들이 세상을 보며 사는 성악가들의 길이다.

주실 때는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퍼부어 주시고, 교만할 때 치시며, 다시 그 자리에서 세우시되 새 영을 주셔서 세우시는 우리의 하나님은 아무리 어려운 길도, 아무리 높은 꿈도, 이상도 그 분의 계획과 일치될 때 꼭 성취의 기쁨을 주신다. 이것은 체험을 통한 나의 확신이다. 지금 나의 목표는 우리의 전공 분야인 성악을 가지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봉의 자리에서 그분이 세우신 이 대학과 교단을 빛내며 그 분이 계획하신 일들을 수행하는데 손색없는 일꾼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분을 위해 헌신 봉사하리라는 각오를 가지며 내일을 향해 사는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
-높은 이상, 거대한 꿈을 하나님을 배경으로 세울 때 그 어느 것이든 우리는 꼭 성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