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스무 번째 이야기 -  대한 간호 협회 제 21회 간호 문학상 1등 수상,
                          서울 위생병원 일반외과 문경희 간호사

2000년 12월 7일자 간협신보에 실린 글입니다.

주최 : 대한 간호 협회 (제 21회 간호 문학상)
응모 부분: 수기
수상 : 1등 당선작
병원 : 서울 위생 병원(일반외과 1병동)
이름 ;문 경 희 간호사
제목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

병원 기숙사에서 병원을 출퇴근하며 바라보는 가을 하늘은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풍성함으로 가득차 보인다. 한국에 도착해서 처음 맞이하는 계절인 '가을' 그리고 가을의 단풍들과 고요한 가을 하늘 속에서 어느 곳으론가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보았던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Deborah! Deborah! help me!!! help us!! please!!"
지난 1년동안 나의 이름은 Deborah였다. 나는 간호사가 되는 것이 삶의 간절한 목표였다. 그리고 학교를 통해 간호지식을 습득하였고, 병원 근무 4년동안 임상경험을 익히게 되었다. 기독교 이념을 가진 병원에서 봉사하면서 환자들에게 육적 치료와 영적인 것을 선물하면서 후회 없는 간호사 생활을 하였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진 간호지식과 기술을 갖고 우리보다 더욱 열악한 조건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병원 생활을 잠시 중단하고, 필리핀에 위치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선교사 전문 훈련 기관에 등록하여 3개월동안 영어와 선교사 교육을 받고, 동남 아시아의 한 나라인 네팔로 선교지를 배정 받게 되었다. 그러나, 네팔은 비자를 받기 어려워서 5개월은 필리핀 '루손' 이라는 농촌 지역에서 보내야 했다.
필리핀 '루손' 지역은 옛날 우리나라 농촌과 비슷한 곳이었다. 그곳의 집은 대나무와 짚으로 이루어졌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집에서 그들은 살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필리핀 여청년 2명과 작고 아담한 집을 구입해서 그 지역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마간당 우마가뽀!(안녕하세요)" "살라맛뽀!!(고맙습니다.)" 웃으면서 인사를 하면서 몇 주간을 보냈고, 마을 사람들이 모심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논에 직접 들어가 농사일을 직접 돕기도 했다. 그들은 내 옷이 더러워진다고 논 안으로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처럼 땀을 흘리고, 일을 도우면서 옷이 더러워진 내 모습을 보고 그들은 나에게 관심을 가졌고 우리들은 점점 친한 친구들이 되어 갔다.. 나는 그들처럼 말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필리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며칠 후, 우리는 아침마다 하루를 위한 기도를 마치고 한 손에는 혈압계와 응급 상자와 성경을 갖고 집집 방문을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은 비위생적인 환경과 부적절한 음식물의 섭취로 중풍, 심근경색, 기관지염, !
관절염, 고혈압, 천식 등의 많은 질병을 갖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 가고 있었다. 병원이 멀고 비싸서 질병을 안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어서 종교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많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개선을 위해 기도해 주고, 교육시켜 주며, 그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수치료와 숯가루를 이용한 치료였다.
어느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가정 방문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큰 함성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마을 사람 모두가 큰 물동이를 들고 한 곳으로 뛰어 갔다. 나도 깜짝 놀라 뛰어 가보니 이웃집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짚과 대나무로 만든 집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거세어 다른 집으로 불똥이 붙고 있었다. "안..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119 소방대에 연락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계속 물 펌프 손잡이를 누르면서 물을 끌어 올리고 우리들은 물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과 함께 물통을 들고 불길을 진화하기 위해 뛰어 다니는데 갑자기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발바닥을 보니 오래된 대못에 발바닥을 찔려서 피가 주르륵 발바닥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점점 통증이 심해져서 집으로 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2주일간 걷지 못하고 방에 누워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 다쳤다고 걱정해 주었고 우리 집에 방문해 주었다. 또 그 기간에 내 생일이 겹쳐져서 나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으로 준비한 두 가지 특별 음식을 두고 "Happy!
birthday to Deborah----!!" 그들이 아픈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들이 나를 위해 생일 파티를 해 준 것이였다. 비록 외국에서 사고를 당했고, 비록 혼자 맞이하는 생일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사랑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붉게 물들어 있는 아름다운 필리핀의 하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보게 되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그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응급실, 어린이 놀이 방, 미용실이 되었다. 우리에 대한 소문이 멀리까지 퍼져 농사 짓다가 상처 난 사람들이 찾아와서 치료 받고 기뻐 하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머리를 깍아 주었을 때, 예뻐진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고마워 했다. 어떤 날은 자신들이 정성껏 농사 지은 호박, 채소, 바나나, 망고...등을 우리 집에 부끄러운 듯 내밀곤 했다. 고맙고 착한 사람들 내 마음은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 지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진 마을로 방문을 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강렬한 필리핀 태양이 내리 쬐고 그늘 한점 없는 들판을 왕복 2시간씩 걸어서 약상자를 어깨에 메고 걸어 다녔다. 함께 살고 있는 동료는 힘들다고 그 곳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 마을에도 많은 환자들이 있었고 특히 한 쪽 발에 염증이 생겨 발을 절단해야 할 지경에 이른 학생들이 있었다. 'Roman'과 'Jean'이라는 학생들이었다. 매일 그 학생들을 위해 숯가루 팩을 준비했고, 항생제를 조금씩 사용했다. 들판 길을 걸으면서 너무 뜨거워서 걷다가 쓰러질 것 같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염증 부분의 이물질이 벗겨 지고 새살이 돋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에 힘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도와 교육을 통해 삶의 희망을 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었을 때, 부모님들이 함께 걸어 나와서 "Deborah!! 살라맛포 (고맙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고마움의 표시로 이웃 집의 경운기를 빌려 와서 태워 주었다. 나는 경운기 뒷 좌석에 앉아서 울퉁 불퉁한 길을 달리면서 끝없이 ?
狙컨?들판에서 춤추는 벼와 미소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는 노을 빛 하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 속으로 우리는 달려 가고 있었다.
어느 날, 머리 전체를 염증으로 둘러싸게 만드는 피부병이 한 마을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나는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고, 특히 한 가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집안 사람들은 손으로 만지기 어려울 정도로 머리 전체에 고름이 흐르고 있었고, 2-3개월된 아가 두 명은 온 몸이 피부병으로 괴로워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 이들을 잘 치료할 수 있게 도와 주세요! 이들의 피부가 새롭게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 의료 기술이 낙후된 그곳에서 나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소독할 재료가 없어서 나무로 불을 피우고 물을 데워서 계속 소독 처리를 하고 약품들은 아껴 가며 맨 손으로 정성껏 발라 주었다. 차츰 할머니의 머리 부분에서 염증이 사라져 가고 아가들이 밤에 잠을 자기 시작한다고 했다. 음식물에 대한 권면과 전체적인 청결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했다. 드디어 마지막 치료를 마치고 내가 집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온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드보라, 살라맛뽀, 고마워요,.." 아가 엄마들이!
"우리,, 아가.. 고마워요"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가 멀어질 때까지 집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날 신작로를 걸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져서 하늘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 그 하늘을 보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네팔을 가기 위해 본부로 들어 가게 되었다. 필리핀 '루손' 지역을 떠나 오면서 모두가 마지막 날 교회에 모여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내게 준 하늘을 간직하며 그곳을 떠나와야만 했다.
나는 필리핀 루손 지역에서 동남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가난하고 세계 10대 빈민국 중의 하나인 네팔이라는 나라에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혼자서 내린 네팔 공항은 국제 공항답지 않게 우리 나라 시골 간이역 같은 시설이었다.
나는 네팔에서 네팔의 수도인 카투만두에서 사는 미국 선교사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들은 네팔을 돕기 위해 5년전부터 미국에서의 모든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네팔을 위해 사는 가족들이었다.
네팔은 국교가 힌두교여서 선교 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된 곳이었다. 내가 만약 그 곳에서 종교적인 문제를 일으키면 추방 당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처음부터 지역 주민들의 눈빛이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과 기독교인에 대한 이질감으로 차갑게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이고, 왜 여기 왔느냐? 직업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했다. 다행히 선교사라는 신분외에 나는 자신있게 내 신분을 밝힐 수 있었다." 저는 한국에서 온 간호사예요. 건강 교육을 위해 잠깐 왔어요." 사람들은 내가 간호사이기 때문에 무척 좋아했다. 역시 간호사는 얼마나 좋은 봉사자의 위치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는 네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를 익히고 열심히 웃으면서 "Namaste?(안녕하세요?)" 힌두교 언어로 인사를 시작했다. 나는 나를 그 곳으로 보낸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가난하고 비위생적으로 겨우 생명만 유지하는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 필리핀은 네팔보다 선진국이었다. 네팔 사람들은 쓰레기를 거리에 다 버린다. 그래서 질병도 많은 곳이었다. 새벽 일찍 ?
坪米玲?쓰레 받이를 갖고 거리를 쓸기 시작했다. 며칠 후 외국인이 자신의 나라 거리를 쓸고 있다고 기분 나쁘다며 거리 쓸기를 중단하라는 말이 들려 왔다. 거리 쓸기를 할 때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사람들이 다시 쓰레기를 버렸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새마을 운동을 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이었다. 마을 젊은 층이 처음으로 나를 도와서 거리를 쓸고 쓰레기를 모아서 불태워 주었다. 나는 불타는 쓰레기와 젊은이들을 보면서 '네팔에서도 새로운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리라! 새로운 개혁의 바람이 불리라!' 라고 확신했다. 그 날 바라본 새벽 하늘이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네팔에서는 기독교적인 활동이 금지되어 있어 나는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야만 했다. 그래서 마을 어린이들과 학생들과 친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매일 그들과 축구를 시작했다. 그들을 토요일 오후에 불러 모아서 영어 노래와 한국 노래를 가르쳤고, 건강 체조, 건강 교육, 금연 교육, 기타 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들은 매일 매일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네팔은 모든 사람들이 흡연 대회를 하듯 흡연을 어느 곳에서나 대상을 막론하고 모두가 흡연을 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네팔을 떠나기전까지 학교를 방문 하면서 네팔의 미래들에게 금연 교육과 건강 교육을 해야겠다는 것이였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부 학교를 방문해서 학교장님들과 선생님들의 허락을 받고 교육을 시작했다. "이 교육은 네팔에서 꼭 해야 할 일이예요. 타국에서 고생이 많군요. 열심히 해 주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모든 학교장님들이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셨다. 그래서 미국인 선교사 집에서 금연에 관련된 슬라이드와 자료를 빌려서 학생들의 취향에 맞게 자료를 준비 했다.금연 교육 할 때 바라본 학생들의 빛나는 눈망울 때문에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햇살이 뜨겁게 내리 쬐어도 나는 무거운 슬라이드와 자료를 갖고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살에 새로운 결심과 그들이 가정과 사회를 교육 시키는 주역이 되길 바라면서 열성적으로 교육 시켰다. 학교 금연 교육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무료 진료와 학생들을 위해서 머리 카락을 손질 해 주었다. 그들의 머리 카락은 감지 못해서 엉켜 붙어 있었고, '?
? 벌레가 기어 다녔지만 그들의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감당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학교 학생들을 거리에서 계속 만나게 되었다. "Deborah! 고마워요. 저와 제 친구들이 금연 교육 받은 후 금연 한지 10일 됐어요. 이런 교육 받아 본 적이 처음이였어요. 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말해 줄 거예요." 그들이 새롭게 알게 된 교육에 관심을 갖고 조금씩 삶에 적용하는 말을 듣고 우리는 그 날의 하늘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함께 느꼈다.
금년 7월 24일에 함께 축구하며 친구가 된 지역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네팔말로 금연 건강 교육을 훈련시켜서 지역 주민들을 초청 하여 큰 건강 세미나 행사를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순서를 보기 위해 왔고, 학교장님들은 학교 운동장과 의자를 빌려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행사를 돕겠다고 봉사 해 주었다. 그 날 나의 친구들인 네팔 어린이와 학생들이 네팔말로 어른들과 지역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확신에 찬 모습을 보며 네팔의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그들은 날 위해 많은 선물들을 준비해 주었다. 손으로 직접 만든 꽃 목걸이와 학교 학생들이 자신들은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니면서 날 위해 자신들의 돈을 조금씩 모아서 네팔에서 가장 예쁜 신발을 사서 선물로 주었다. 학교장님들은 그분들의 정성을 실은 글을 액자 속에 넣어 주셨고, 나와 축구했던 아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T셔츠 위에 각자 새겨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늘 색 T-셔츠를 선물로 주었다. 처음에는 내가 외국인이고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적대시하던 사람들이 그날 저녁 나를 향해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
流涌“?마지막 인사를 했다. " 그 동안 너무나 고마웠어요. 오늘은 제가 네팔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입니다. 특히 여러분의 자녀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평생 잊지 못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리고 행복하세요... 흑..흑!!"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에게 감격에 차서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나는 그 날, 저녁 노을 빛으로 물든 네팔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나는 행사가 마쳐진 다음날 2000년 7월 25일 사람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며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필리핀, 네팔에서의 짧았지만 감동으로 이어진 1년의 선교 봉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 오게 되었다.
내가 그리워 하던 한국에서 나는 지금 다시 살고 있다.
두 달 전만 해도 사람들은 내게 네팔 사람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내게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다시 서울 위생 병원에 복직하여 일반 외과 1병동에서 임상 간호사로서 일하고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은 간단한 수술인 맹장 수술부터 말기 암환자까지 입원하여 생활하는 병동이어서 더욱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곳이다. 맹장 수술을 받고 쉽게 퇴원하는 환자들, 암 진단을 받고 충격으로 계시는 환자와 보호자들을 나는 매일 만나고 있고, 항암 요법으로 식사를 못하며 괴로워 하는 환자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는 날을 기다리는 환자들, 암 덩어리가 주는 고통을 진통제로 진정 시키며 하루 하루를 힘겹게 보내는 환자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불꽃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으로 눈물 짓는 보호자들의 눈물 속에서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그 분들을 위해 무언가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나는 서로 다른 나라인 필리핀과 네팔에서 바라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내가 살고 있는 한국, 그 중에서도 내가 일하는 삶의 현장인 병원에서 내가 만나는 환자와 보호자와 동료들 속에!
서 그 감동의 하늘을 만들어 가고 싶다. 그래서 결심했다. 환자와 보호자들께 노래 선물을 드리기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근무를 마치고 오후 시간에 병실을 방문하며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드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 해 드리고 있다. 인생의 절망으로 술과 부절제의 생활로 입원한 환자들은 삶의 재활을 위해 원목실에 환자들을 연결해서 삶을 수술해 드리는 다리 역할을 해 드리고, 수술 전에는 환자들을 위해 잠깐씩이라도 기도 해 드리고 있다.. 장기 투병 중인 환자 보호자들을 위해서는 용기가 되는 글을 적어 엽서로 드리게 되었다.
오늘은 술과 부절제로 어둡게 사시던 환자가 병원을 통해 새로운 신앙과 삶을 발견해 지금은 새롭게 살아 가고 있다면서 보호자와 함께 밝은 얼굴로 병동을 다녀 가셨다. 수술 후 퇴원하시는 환자들은 "수술 받기 전에 기도 해 준 덕분에 이렇게 빨리 좋아 진 거 같아요. 그 때 마음이 너무 평화로워졌거든요..." 고마움의 눈으로 손을 흔들며 퇴원하신다. 그리고, 노래 부르고 기도해 드릴 때 다른 종교를 가진 환자들도 있지만 나의 마음을 이해하시듯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이시면서 행복해 하신다. 의학 기술로도 포기하고 웃음을 잃고 죽는 날을 기다리는 환자들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나고 앵콜로 한 곡 더 불러 달라시며 박수를 치실 때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날까? 환자들의 미소를 보며 나는 한국의 하늘을 바라본다. 역시 네팔과 필리핀이 아닌 한국에서 비록 장소는 다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이 우리 모두를 바라본다.
그래서 나는 짧은 경험을 통해 느낀다. 내가 가진 작은 부분들을 아낌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고자 할 때, 종교와 이념과 문화를 초월해서 세상이 가장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전에는 보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함께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내가 가진 건강, 행복, 재능, 간호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이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누어 주기 위해 내게 허락된 것임을 나는 하늘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오늘도 출근하면서 하늘을 바라 보며 "오늘도 내가 밟는 이 땅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늘을 이루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하늘을 보며 함께 행복하게 하소서!"라고 기도 해 본다.
그리고 오늘도 하늘을 바라 보며 힘찬 발걸음을 병원으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