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서른 여덟 번째 이야기 -  F 학점의 교수, 그가 전쟁터에서 안식일에 훈련을 피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아침고요 수목원의 설립자로 잘 알려진 삼육대학교 원예학과 교수 한상경 박사. 군복무 중이던 1975년, 월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어떻게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을까? 군에서 제대하고 나면 대학 생활이 좀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지도교수는 영낙없이 F 학점을 주었다. 종합시험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외국어 시험은 번번이 안식일에만 걸렸다. 그가 다니던 대학에서 최연소자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된 이면에 역사한 하나님의 손길을 들어보자. 다음의 이야기는 1997년 11월 15일, 신림동 교회에서 모였던 "안식일을 지키고자 고투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 모임"에서 들려준 그의 간증이다.



훈련소에서 만난 천사

안식일은 천사를 만날 수 있는 날인 것 같다. 논산 훈련소에서의 일이다. 절망감에 빠져서 군형무소에 가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금요일 저녁에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장교가 찾아와서 이제는 형무소로 가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군의관이었다.
"저는 과거에 위생병원에서 인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제게 기도하자고 할 때 눈을 뜨고 했는지 감고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끝내 마음에 들지 않아 사표를 쓰고 나왔는데 세월이 갈수록 마음 속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떤 내무반장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자기 소대는 아픈 사병도 많고 안식교인지 뭔지하는 훈련병도 있어 골치가 아프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괴로워서 당신을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도움을 청해야 할 사람은 훈련병이었는데 오히려 육군 대위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날 한상경 훈련병과 군의관은 열두 시가 넘도록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고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가 헤어지면 하는 말이,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였다. 이틑날부터 훈련소에서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다. 점심때에 밥만 먹기 위해서 내무반으로 돌아갈 수 없어 점심은 장교 식당에서 하게 되었다. 그 장교의 이름은 윤동헌씨이고 나중에 침례를 받았다. 그가 바로 천사였다.

안식일에만 입원하는 환자

후반기 교육은 다른 부대로 배치되었다. 이곳에서도 안식일을 해결해야 했다. 금요일이 되었다. 그 부대의 군의관이 오더니 "25연대 윤 대위가 자네를 부탁했는데 자네가 안식일교인인가?"라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에 그는 "내가 자네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금요일날마다 입원시키는 길밖에 없겠군."이라고 말하며 금요일만 되면 입원해서 병원밥을 먹게 하고 혼자 예배를 드리다가 안식일 저녁 때가 되면 퇴원해서 부대로 돌아가는 이상한 환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대공초소에서 만난 천사

자대로 배치받는 곳은 충주시내를 벗어나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대공초소였다. 이곳에 도착해서도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쉬지 않고 열심히 기도드렸다. 금요일이 되었지만 아직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해두지 않았다.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기다리는 안식일이 되는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충주비료공장의 무장경비원이었다. 그에게 어떤 도움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한 마디를 건네었다.
"저는 안식일교인인데 교회를 찾지 못하고 있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식일교회요? 저기 문화주택 9호에 안식일교인이 살고 있습니다. 저쪽에 남한강 건너편에 유성리교회라고 하는 안식일교회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쌍안경을 들어서 남한강 건너편을 살펴보았다. 강 건너편 멀리에 황폐한 방앗간 같은 건물이 들어왔다. 그렇게도 기도드리며 찾고 찾았던 안식일교회였다. 제대 후 20여년이 지나 충주에 갔을 때 그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오늘 천사가 방문했습니다." 옛날 산꼭대기 대공초소에 만났던 최정남씨라고 하는 충주비료공장의 무장경비원이 그 교회에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른 하늘에 "비를 내려주시옵소서"

그후 월남전에 차출이 되어 월남으로 파병이 되었다. 안식일 아침에 훈련명령이 떨어졌다. 한국에서처럼 빈 총을 들고 하는 훈련이 아니었다. 실전처럼 총을 쏘면서 진지를 공격하고 포를 쏘면서 하는 훈련이었다. 한국에서는 취사장에서 밥을 하다가 철조망 넘어서 도망이라도 가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왔지만 이날 아침의 훈련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안식일은 지켜야 했다. 그러나 월남에서는 갈 곳이 없었다. 한상경은 평생에 가장 어리석을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엘리야가 비를 달라고 할 때 비를 내려 주셨는데 오늘은 안식일입니다.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벙커에 들어가 기도를 반복하고 반복했다. 마침내 집합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벙커를 벗어나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태양은 어느 때보다도 더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가벼웠다. 전우들과 함께 군장을 짊어지고 집합장소로 나갔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전우에게 억누를 수 없는 확신을 전했다. "조금 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 억수로 쏟아지기 때문에 오늘은 훈련이 없다"고 말했다. 조금 후에 중대장이 나와서 훈시를 시작했다. 그때 바로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서 하늘을 덮기 시작하더니 난데 없이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명령은 "해산"이었다. 훈련은 없었다. 하늘에서는 소낙비가 쏟아지고 그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F 학점의 대학교수

삼육대학교 원예학과 교수인 한상경 박사의 대학교 때 성적표에는 F 가 적지 않다. 2학년 성적표에는 식물생리 F, 4학년 1학기 때 과수원예가 F였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는 잘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2학년 때 F를 맞은 과목은 3학년 때, 그리고 3학년 때 F를 받은 과목은 4학년에 가서 만회했는데 문제는 4학년 때 F를 받은 과목이다. 의대도 아닌데 5학년을 다니게 되었다. 그분은 다름 아닌 2학년 때 F를 주셨던 심경구 박사였다. 식물생리 F, 4학년 때 과수원예도 심경구 박사의 과목으로 F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갈등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신앙인이어서 이해를 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예수를 믿어 낙제를 하게 되었다고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을 때 마음은 편안했다.

"야, 우리 식구 안식교인 됐어!"

4학년 2학기가 되었다. 학교에 가보니 달라진 게 있었다. 우선 교무처장이 경질되었다.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이 연명으로 학교에 진정서를 올렸다. 한상경을 구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진정서를 접수한 대학교의 행정자들은 특별한 회의를 열어서 2학기에 한상경 한 학생을 위해서 과수원예를 설강하고 심경구 교수에게 지도를 맡기는 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대학을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원예학의 대학교 교재로 널리 쓰이는 책 가운데 "과수재배 각론"이란 책이 있다. 고려대 김성복 교수와 성균관대 심경구 교수, 그리고 삼육대의 한상경 교수 3인의 공저이다.
여러 해가 지나서 그렇게도 줄기차게  F를 주었던 심경구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우리 집 사람이 안식교인됐다! 너 그 시조인지 뭔지 자꾸만 보내니까 그렇게 됐잖아!"  한상경 교수의 은사인 심경구 박사의 사모는 97년 여름에 사슴의 동산에서 침례를 받았다.

"안식일은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은 증거의 기회입니다."

어느 때는 안식일 문제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는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안식일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과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안식일 문제는 대학원에 가서도 끝까지 따라다녔다. 박사 과정 3년 동안 종합시험 중 어학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섯 번 있었는데 그 가운데 네 번이나 안식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도교수가 그를 불렀다. 왜 종합시험을 안보는가 물었다. 찾아가서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지도교수가 먼저 부르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안식일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아무리 잘 설명을 해도 지도교수는 납득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누가 도와주겠는가? 석사와 박사가 되는 사람이 수 천명이나 되는데 한 사람 때문에 시험 날짜를 바꾸겠는가? 마지막으로 시험을 볼 수 있는 날짜가 정해졌다.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 종합시험 날짜가.....3월 며칠인데....." 한상경은 달력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의심했다.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아무리 확인을 하고 다시 확인해도 그날은 분명히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은 직원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이다. 그리고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시험 날짜는 일요일이었다. 그는 일요일에 시험을 보았고, 합격했으며, 30대 초반에 그 대학에서 최연소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상경 교수는 그의 간증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쳤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마음 속에 하늘을 그리며 하늘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땅은 이 죄악 세상에 발을 디디고 분리의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해 보고 오늘 이 희미한 관계 속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의 관계로서 살아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면서 뜨거운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는 이들은 더 이상 죄 지을 수 없는 영광의 경험이 무엇인지, 그 나라에서 친히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눈물을 씻기는 그 순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때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시고 하늘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신 그분을 우리가 더욱 의지하고 그 하늘을 향해 가는 위대한 대열 속에 우리가 서 있다는 긍지와 감사함을 갖고 용기를 내어 우리 함께 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