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마흔 세 번째 이야기 -  아멘으로 시작한 데이트

"기도하고 데이트 시작합시다." 신앙심과 열심히 불타오르는 어떤 신학생의 이야기가 아니다. 평범한 삼육고등학교 졸업생과 목사님의 여동생의 첫데이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003년 3월 첫 안식일, 덕송리교회 안식일학교 시간에 들은 박상진 집사(45세)의 아내 김선호 집사(40세)의 간증을 옮겨본다.



"기도하고 데이트 시작합시다."

안녕하세요? 기쁘고 행복한 안식일입니다. 덕송리 교회에 나온 지 꼭 한달이 되었네요. 교회 나온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참 친근감이 있는 것은 예전에 회사에 근무하던 교회 몇 집사님들, 가족 낯익은 얼굴 덕도 있겠지만 특히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 덕에 짧은 기간에 벌써 내 교회 같은 생각이 들게 된 것에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순서를 통해 잠시 나의 신앙생활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였던 저는 어려서부터 언니와 오빠의 믿음을 따라 교회엔 잘 다녔습니다. 성장해서 결혼할 시기가 되니까 제 마음에 큰 부담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약한 믿음 상태를 가지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신앙을 잘 유지하기가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 때부터 늘 기도한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 저는 믿음이 없으니 믿음 좋은 사람 만나서 온 가족이 신앙생활 잘 하다가 함께 하늘에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이었습니다. 한 번은 야영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오빠가(김병호 목사) “우리 1년 선배 멋있는 사람 있는데 한 번 만나볼래?” 오빠가 동생을 위해 소개한다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빠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 그이가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제까지 믿음 좋은 사람을 기도하며 찾았는데 처음 만나 강가를 걸으면서 그이가 제게 맨 처음 한 말이 “기도하고 데이트 시작합시다” 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올 일인데 그 땐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질 않고 ‘아, 이렇게 믿음 좋은 사람이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만나 2시간 정도 이야기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 사람만 기도했는데 데이트를 마칠 때는 둘 다 기도하고 이름도 성도 주소도 묻지 않은 채 헤어졌는데 교회로 연락이 와서 10개월 정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시댁 쪽에서는 아들을 결혼시킬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그해에 대학을 졸업했고 직장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4월초에 시누이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모님도 안계셨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자상하고 따스함에 이끌려 빨리 결혼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5월초에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시어머니께서 조카 한 명과 시동생 한 명을 학교 보내시느라 조그마한 방을 얻어 데리고 계셨습니다. 남편도 결혼식만 올려주면 조카와 시동생을 데리고 그 집에서 살겠다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겨우 결혼 승낙을 받았습니다. 4월초에 동생 결혼식에 초청했기 때문에 5월에 다시 친척들을 부를 수 없다고 하셔서 그냥 가족 몇몇 분만을 모시고 결혼식을 했습니다. 아무런 대책 없이 결혼만하고 보니 결혼은 정말 꿈과 낭만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힘든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조카와 시동생의 도시락을 하루에 세 개씩이나 싸야했습니다. 안식일을 해결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려니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포장마차, 간판하시는 집사님 보조원 노릇,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부업을 해도 조카와 시동생 네 식구의 생활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시댁에서는 보내던 쌀까지도 안 보내주시고, 시동생, 조카에게도 생활비 한 푼 주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힘들게 대학까지 가르쳐 놓으니까 안식일 지킨다고 취직도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고 배부른 소리 한다며 고생을 더해봐야 한다는 시댁 어른들의 싸늘한 시선은 정말 우리를 슬프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도저히 안 되겠는지 큰 형님께서 취직자리를 하나 부탁해서 면접을 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남편을 보내며 “안식일 해결이 안 되면 그냥 와요.” 라고 이야기했지만 정말 두부하나 살 돈이 없을 정도로 막막한 날들이었습니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 “안식일 해결이 안 된다기에 그냥 왔어.” 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남편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살지만 그때처럼 어려움 속에 굴복하지 않는 믿음의 남편이 그렇게 멋있어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알아서 먹여 주실 테니. 정말 그때 둘이 부둥켜 앉고 잘했다고 춤을 췄으니까요. 교회에서는 집사님들과 장로님들께서 남편의 취직을 위해 기도해 주셨고 불과 며칠 되지 않아 훨씬 더 좋은 조건에 안식일이 해결되는 직장을 구했고 결혼 10개월 만에 우리의 밥걱정은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2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서천에서 김 공장을 하며 보람되게 살았지만 1997년 연말에 불어 닥친 IMF 사태로 협력회사의 부도로 인해 함께 회사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어 지금은 200여명의 사원을 둔 중소기업체(윈 시스템, 수원)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