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쉬흔 여섯 번째 이야기 -  도산 안창호와 춘원 이광수

피천득, 김재순, 법정, 최인호, 우리시대 최고의 90, 80, 70, 60대 지성인을 대표하는 이들의 대화를 묶은『대화』(샘터, 2004)라는 책에 보면 피천득이 자신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두 사람인 도산 안창호와 춘원 이광수를 말한다.



이광수의 『사랑』에 등장하는 주인공 재림신자 석순옥과 그의 가족에 대한 묘사로 본 이광수의 재림교회에 대한 인식

  피천득은 상하이에 있는 안창호 선생을 만나보라는 이광수의 권유로 도산을 만나 인연을 맺는다. 피천득이 1930년대 상하이에서 공부할 때 병이 났는데, 안창호 선생이 자신을 상하이위생병원에 입원시켜주었다고 한다. 피천득은 이 병원에서 자신을 치료해주던 한 간호사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간호사는 피천득에게 고향 이야기도 하고, 선물로 받았다는 예쁜 성경도 빌려 주었다. 그녀는 ‘누가복음’을 좋아한다고 했고,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를 읽어주기도 했다. 그 후 상하이사변이 일어나 피천득이 그녀에게 한국으로 함께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저의 책임으로나 인정으로나 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동안 머물며 간곡히 설득했지만 마음을 바꾸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피천득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재림교회 간호사 이름이 ‘유순’이다. 나중에 춘원이 『흙』이라는 소설을 쓰다가 여주인공 이름을 못 정해서 고민하는 걸 본 피천득이 “유순이라고 지으면 어떨까요”라고 해서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상하이위생병원은 춘원 이광수와 시인 노천명도 입원했었다. 춘원은 입원 당시 한 재림교인 간호사의 친절함과 순수성을 보고 놀라움과 큰 감동을 받았다. 춘원은 그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재림교회와 신자들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춘원은 이때의 감동과 기억으로 그 간호사를 자신의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데, 그녀가 바로 고등학교 시절 한 번쯤 읽어보았을 춘원의 『사랑』의 주인공인 석순옥(石荀玉)이다. 『사랑』에는 석순옥의 가정이 안식교(공식명칭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줄여서 ‘재림교회’ Seventh-day Adventist라 함)를 믿는 가정으로 나오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부분은, “그 날 점심 때에 순옥은 집에서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토마토랑 고구마랑 감자랑 이런 것으로 비린 것 들지 아니한 양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유와 닭의 알만을 넣은 청초하고 싱싱한 안식교인식 요리를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순옥의 집에 몇 해 동안 순안에 있을 때에 안식교 선교사의 집에서 먹어보고 배운 것이다. 순옥의 어머니가 안식교의 침례를 받은 관계로 순옥의 오빠 영옥과 순옥이네 형제도 안식교인이었다......(순옥의 오빠) 영옥은 마침 졸업시험이 토요일에 걸치게 되어서......이러한 안식교의 엄격한 종교생활이 순옥이와 그 형제들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힘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이래서 순옥은 안식교의 채식주의를 좋아한다.”

 

  두 번째 부분은, “순옥은 방을 치우면서 중얼거렸다. 순옥의 눈에는 안식교에서 닦여 난 오빠의 얌전하던 지난날을 생각하였다......그러고 역시 진실한 안식교인의 가정에서 자라난 얌전한 올케를 생각하였다......”

 

  세 번째 부분은, “기애가 어려서부터두 정신적이었지만은 근래에 와서는 아주 종교적이야. 우리 형제가 다 안식교 가정에서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종교적 훈련을 받구 자라났지마는 내가 근래에 비종교적으로 타락하는 대신에 내 누이는 점점 더 종교적으로 나아간단 말야.”

 

  네 번째 부분은, “순옥은 안식교의 선교사들의 청정하고 경건한 생활을 흠모하고 자랐거니와......참으로 성경에 보던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던 때에 그 제자들이 하던 생활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이광수는 <시조(時兆)> 창간 30주년 기념호의 각계 명사들의 축사 중에서 ‘안식교회와 나’라는 축사에서 안식일 교회를 존경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의 진실하고 청쟁함을 사랑하며, 안창호 선생의 동서 김창세 박사를 통해 안식일교를 알게 되었고, 매주 한 차례식 캉거라는 이름의 교수에게 매주 성경을 공부했으며, 안식교회의 진실하고 청쟁한 생활의 모범은 교파의 여타를 물론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성업이라고 맺고 있다.

  이광수는 피천득에게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를 만나보도록 해 만나게 하는 등 안창호와의 적극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의 메이지학원 중학부에서 공부하던 중, 안창호가 귀국하는 도중 도쿄에서 연설하는 것을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장편 <선도자(先導者)>를 연재 발표하나 안창호를 모델로 한 그 내용이 문제돼 총독부에 의해 중단조치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국민계몽과 조국 독립에 헌신한 선각자였으며, 한국 재림교회의 기초를 놓은 근당 임기반과 동향 친척간이자 후원자였다. 도산은 집이 가난해 한 때 임기반의 집에서 숙식하기도 했다. 도산과 근당은 독립협회 활동, 하와이에서의 민족계몽운동, 신민회 조직, 국채보상운동, 조선독립청년단 조직과 독립자금 모금활동 등을 함께 벌이기도 했다. 근당 임기반은 재림교인인 이석관의 장녀 이혜란과 도산 안창호의 백년가약을 성사시켰다.

 

  도산의 사상에는 재림교회의 사상적 편린이 엿보인다. 근당이 설립한 의명학교(義明學校, 현 삼육대학교)에서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교육이념인 지덕체의 삼육이념을 흥사단을 조직할 때 민족기풍을 혁신하고 건전인격을 창출할 이념으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도산의 직업교육 강조도 의명학교의 실업교육과정과 유사하다.

 

  주요한이 편저한 『안도산전집』 485쪽에는 도산 선생이 옥사하기 전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소. 그렇게 원한다니 순안 안식교의 제품인 포도즙은 진정품인데 안국동 남계양행에서 파니 용기까지 가져오면 한 번 시험하겠소”라고 하므로써 도산과 재림교회와의 인연이 임종까지 함께함을 알 수 있다.

 

  도산과 춘원은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재림교회의 신앙과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이다. 도산과 춘원의 재림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일부의 이야기 속에서 재림교회는 민족의 고난과 발전의 역사 속에서 ‘더불어 함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유산을 오늘에 되살려 실천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지성인으로서 시대정신을 밝히고 ‘더불어 함께하는 새로운 100년’의 역사의 지남(指南)을 우리는『대화』에서, 60대 지성인 최인호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할수록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단순명료한 데도 현대인은 다양한 논리라는 미명 하에 그 사실을 잊고 있거나 모른 체하고 있어요. 지금이야말로 ‘진리의 검으로 무장하고 빛의 갑옷을 입을 때’가 아닐까요”

                                                                    <명지원 교수/ 삼육대신문 330호>(2006.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