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ntillet cAjrud: A Case for Critical Revision


Kuntillet cAjrud is an archaeological site with data in objects, images and texts that kept scholars on both sides of the hermeneutical divide busy. The secular/nihilistic orientated archaeologists are trying to connect the dots on both image and text to what they have already chose to see regarding the text: that the text is a late post-exilic creation and archaeology in their view is uncovering the “true Israel and their religion and their pantheon”. The other view is biblically textual-based, a position supported by other extra-biblical sources of literacy in all periods of the Levant in nearly all Ancient cultures continuously, and not only after the sixth century BCE. The hazard to prove earlier writings’ existence archaeologically is the preservation ability of writings materials used that leads to meagreness of data, not the reality of its existence. Kuntillet cAjrud is not only an Ashera site but also a Baal site, mentioning the word “prophet”; included an eschatological text with elements similar to Habakkuk 3 (520 BCE) and the Divine Warrior motif in Kajr 4.2. Ceramics (pithoi) came from Jerusalem, Samaria and even further north. Was Ashera written on the pithoi in Jerusalem or on Kuntillet cAjrud? Ashera also appeared on plaster-texts. Scholars are divided how it should be interpreted: that Ashera is a cultic place, gameboard, goddess or name of person. The 3rd person singular pronoun added to the name can be shown also at Ebla and Ugarit. However, consensus of nihilists preferred to read “his [Yahweh’s] Ashera”. It was found in this article that a revision of all data rather points to the fact that the Ashera of the Addresee is in mind just like at Khirbet el Qōm where it reads “his [Uryahu’s] Asherah, not that of Yahweh. It does not deny that idolatry was exercised here but as the prophets (early = Amos, Hosea, Isaiah) all condemned Ashera and Baal worship on mountains near Tema, at Samaria, so this continued also with the later prophets Ezechiel and Jeremiah around the invasion of Nebuchadnezzar in 597 BCE and continuing to 586 BCE. The iconography at the site had strong connections to Greek Vase art, especially the particular connection to one cow and calf motif dating to ca. 520 BCE. Nimrud Ivories are dated not only in the 9th century but from the 9th to the 6th century BCE as the scholars reminded us. Textiles at Kuntillet cAjrud were in abundance, especially linen and also wool. The prophets like Ezechiel indicated the importance of textiles for the idolaters of that era. Whereas nihilistic archaeological-priority scholars find support at Kuntillet cAjrud for Yahweh having a consort and proving their stance that Israel religion transformed from polytheism to monotheism, the opposite view in this article uses their excellent data to prove that the biblical texts (that not only originated after the exile) are text and data connected to such an extent that archaeology cannot be done without a text on the tel. The Lachish III pottery debate leaves open a 800 BCE date or a 597 BCE date (favored by this writer) and Kuntillet cAjrud are filled with these types of ceramics. Radiocarbon dating does not only indicate a 800 BCE date but as Schniedewind indicated may even touch the 10th century BCE. Phoenician influence at the site led Singer in her confrontation with ca. 800 BCE scholars (early Lachish III dating scholars) to move the timing about 50 years later around 730 BCE (herself also an early Lachish III dating scholar). The gods at this site included: Yahweh; Ashera; Bacal; and the Egyptian god Bes and as a trading post with cultic and entertainment facilities for the visitors, they specialized in Phoenician, Israelite, Egyptian, Greek and other visitors to the water sources at this hill. Kuntillet cAjrud is so relevant for biblical studies, that networks are set up by nihilist female archaeologists to make a quest for the historical Ashera and to raise the issue whether the biblical text have pushed Yahweh’s wife out of the picture in the past, setting up for them the agenda, in this day and age with LGBTQH agitations and world transgender legal jurisdiction concensus, also woman ordination contra the biblical text, to try to ”set free“ Ashera image in the modern world. On the other side of the divide, all the fingerprints of idolatry on mountains as complained by the early and later prophets, over a long period, especially the prophets Ezechiel and Jeremiah, are at this site. At the end of the research, after working with the conventional theory that Teman and Shomron are cities of Teman and Samaria, another theory became more appealing, namely that it refers to persons on the basis of Rabbi Redak’s exegesis of Jeremiah 49:7 and Obadiah 9 for linking Teman to a person as Genesis 36:11 did. Extending Redak’s method it was found that at least three people in various stages of Israel’s history were called by the name Shomron. Instead of F = Kajr3.9: “May he [functionary] bless you to Yahweh of Teman [(conventionally a city)] and to his [(Yahweh’s)] Asherah” rather read F = Kajr3.9: “May he [functionary] bless you to Yahweh of Teman [(a person)] and to his [(Teman’s)] Asherah”. The same is the case with Yahweh of Samaria. The result is that the conventional application that Yahweh had a consort no longer is the only interpretation of the syntax and semantics of the inscriptions.

Keywords: iconography; Ashera worship; Baal worship; prophetism; textiles; Teman and Shomron as persons

Article published:

Koot van Wyk, "Kuntillet 'Ajrud: A Case for Critical Revision." in International Journal of Research in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Vol. 7, Issue No. IV, Oct-Dec 2017: 62-99.

International Journal of Research in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http://www.ijrssh.com

(IJRSSH) 2017, Vol. No. 7, Issue No. IV, Oct-Dec e-ISSN: 2249-4642, p-ISSN: 2454-4671



쿤틸렛 아이룻 이라는 고고학 유적지의 발굴로 데이터가 포함된 물품, 이미지, 그리고 문헌이 발견됨에 따라 해석학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진 양() 진영의 학자들 모두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비종교적/무신론적 성향의 고고학자들은 이미지와 문헌상의 점선들을 그들이 문헌에서 찾으려고 이미 선택한 사실에 맞추어 연결하려 시도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 문헌은 바빌론 포로 귀환 후의 것으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이스라엘의 진정한 종교와 그 신()의 전당”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다. 다른 견해는 성경 본문에 근거를 둔 것으로 성경 이외의 문서 자료에 의해서도, 기원전 6세기 이후로 한정된 것이 아닌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거의 모든 고대 문화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지지를 받아온 입장으로다. 초기 문서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데 따르는 위험 요소로는 사용된 문헌의 보존 능력인데, 실제적인 그 존재가 아닌 빈약한 데이터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쿤틸렛 아이룻은 “선지자”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있으며 단지 아세라 유적지일 뿐아니라 바알 유적지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하박국 3(기원전 520)이나, 예루살렘, 사마리아, 혹은 이보다 더 북쪽 지역에서 유래한 카이르 4.2. 세라믹 (피토이)에서 발견되는 “전사(戰士)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주제와 유사한 요소를 지닌 종말론적 문헌을 포함하고 있다. 피토이에 적힌 아세라는 예루살렘에서 쓰여 졌는가 아니면 쿤틸렛 아이룻에서 쓰여진 것인가? 아세라는 또한 석고 문헌에도 나타난다. 이것의 해석에 관하여는 아세라가 종교적 장소였는지, 게임판이었는지, 아니면 여신이나 개인의 이름이었는지 등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이 이름과 함께 나타나는 3인칭 단수 대명사는 에블라나 유가릿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허무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그의 [야훼의] 아세라” 라고 읽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모든 데이터를 재고한 결과 언급된 바 아세라는 야훼의 아세라가 아니라 키르벳 엘 코옴에서 처럼 “그의 [우리아후의) 아세라”를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이 논문을 통해 발견하였다. 이는 우상숭배가 행해졌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초기 선지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등) 모두 테마 부근의 산지나 사마리에에서 행해진 아세라와 바알 숭배를 정죄하였던 것처럼 기원전 597년에 시작되어 586년까지 계속된 느부갓네살 침공 무렵의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등 후기 선지자들도 동일하게 이를 정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지의 도상(圖像)은 그리스의 꽃병 예술 중 특히 기원전 520srud의 특정 암소와 송아지 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니므롯 상아 제품은 학자들의 주장대로 기원전 9세기 뿐 아니라 9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기까지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쿤틸렛 아이룻은 직물이 풍부했는데 특히 마와 모가 풍부했다.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들은 그 지역의 우상 숭배자들에게 직물이 중요하였음을 지적해 준다. 허무론적 고고학 우선주의 학자들은 쿤틸렛 아이룻에서 야훼 하나님이에게 배우자가 있었으며 이스라엘 종교는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변화하였다는 그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를 찾으려 하는 반면, 본 연구에서는 그들의 탁월한 데이터를 사용하여 이와 반대의 입장에서 포로 귀한 후 생성된 본문 뿐아니라 그 외의 성경 본문에서도 문서와 데이터가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므로 문서가 없이는 텔에 관련된 고고학을 수행할 수 없음을 입증하려 하였다. 라키시 III 도기 관련 논쟁의 경우 기원전 약 800년 경이나 또는 본 저자가 선호하는 대로 597년 경으로도 연대를 추정할 수 있으며 쿤틸렛 아이룻에는 이런 류의 도기들로 가득 차 있다. 방사성 탄소에 의한 연대 추정에 의하면 기원전 약 800 년 뿐아니라 슈니데빈드과 지적한 대로 기원전 10세기까지로도 거슬러 올라 가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싱거는 그 발굴지에서 발견된 페니키아의 영향에 의해 기원전 약 800년을 주장하는 학자들(초기 라키시 III 연대 추정 학자들)과의 대결에서 기원전 약 730년경으로 시간을 약 50년간 움직이게 되었다 (그녀 역시 초기 라키시 III 연대 추정 학자이다). 이 발굴지에 나타나는 신()으로는 야훼, 아세라, 바칼과 애굽의 신 베스 등이 포함되었으며 방문객을 위한 종교와 여흥의 시설물을 가진 교역항으로서 그들은 이 언덕의 수원(水源)을 찾은 페니키아인, 이스라엘인, 애굽인, 헬라인 및 다른 방문객들을 전문으로 하였다. 쿤틸렛 아이룻이 성서연구에 매우 유용하므로 허무주의적 여성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네트웍을 통하여 아세라의 역사성에 대한 탐구, 과거 성경 본문에서 야훼의 아내를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이슈 제기, 또한 그들 나름의 어젠다에 따라 오늘날 LGBTQH 에 대한 논의와 세계적 성전환 합법화 여론화, 그리고 성경 본문과는 대조되는 여성의 안수 문제 등을 제기하여 근세의 아세라에 대한 이미지를 “해방”하려는 시도 등을 전개하고 있다. 반면, 논쟁의 반대편에서 살펴 본다면, 이 발굴지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초기와 후기 선지자들, 특히 에스겔과 예레미야가 책망한 대로, 산에서 행해진 우상숭배의 모든 잔재가 지문처럼 남아 있다. 연구의 막바지에 데만과 쇼므론은 데만과 사마리아의 도시라는 통상적인 학설을 살펴본 후, 더 설득력 있는 학설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창세기 36:11의 경우와 같이 데만을 인물에 연결시킨 예레미야 49:7과 오바댜 1:9에 관한 랍비 레닥의 주석에 근거하여 이것이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 것이다. 레닥의 방법을 연장함으로 이스라엘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적어도 세 사람이 쇼므론이란 이름으로 불리었 음을 알 수 있다. F = Kajr3.9: “그가(기능상의 호칭) 데만(통상적으로 도시를 가리킴)의 야훼와 그의 (야훼의) 아세라에게 그대의 축복를 비노라” 대신 F = Kajr3.9: “그가(기능상의 호칭) 데만(인물)의 야훼와 그의(데만의) 아세라에게 그대의 축복을 비노라”라고 할 수 있다. 사마리아의 야훼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본 연구를 통해 야훼에게 배우자가 있었다는 통상적인 적용이 더 이상 그 비문에 대한 구문적, 어의론적 해석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핵심어: 도상학(圖像學), 아세라 숭배, 바알 숭배, 예언학, 직물, 인물로서의 데만과 쇼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