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사 41:1
20세기 초 재림교회의 최대 관심사는 부흥과 재건이었다. 대형 화재로 배틀크릭에 있던 교단의 외형적인 재산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단이 J. H. 켈로그, A. T. 존즈, E. J. 왜고너 및 기타 명사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교회는 신축된 배틀크릭 요양소와 교단의 의과대학(the American Medical Missionary College) 소유권을 켈로그에게 빼앗겼다.
이 때는 재건도 문제였지만 재건할 장소도 찾아야 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재림신자들이 계속 배틀크릭으로 이주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큰 문제였다. 그들은 각처에 흩어져 살면서 거기서 믿음을 증거해야 할 터인데, 다수의 신자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남의 흉을 보든가 또는 다른 방법으로 재림 신앙의 전파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배틀크릭은 세계 재림교회의 권좌로서 모든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교단의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거기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본부도 거기 있었다. 소수의 사람들이 각종 위원회의 위원직을 겸직하고 세계 각처의 재림교회를 “통치”하였다. 간단히 말해, 1900년의 배틀크릭은 재림신자들에게, 유대교의 예루살렘 같은, 몰몬교의 솔트레이크 시티 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아무튼 새 세기를 맞은 재림 신앙은 “성도(聖都)”의 분산이 불가피하였다.
엘렌 화잇은 1890년대 초부터 분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도시를 떠난 최초의 기관장으로는 E. A. 서더랜드와 P. T. 메이건을 들 수 있다. 그들은 1901년 배틀크릭 대학을 미시간의 베리언스프링즈로 이전하였다.
리뷰 앤드 헤럴드 사옥을 파괴한 1902년의 화재는 출판소와 대총회 본부를 도시 밖으로 이전케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뉴욕 시가 적당한 위치로 보였다. 그러나 1903년에는 워싱턴 D. C.를 선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