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말씀 : 막 7:4-13
유대인들의 전통(1-4)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2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부정한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그 밖에도 그들이 전해 받아 지키는 규례가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대를 씻는 일이다.
올바른 말씀 순종의 삶(5-13)
5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관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 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8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관습을 지키고 있다." 9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관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나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11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관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
▧ 묵상을 위한 질문
1.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나아와 제자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있습니까?
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 본문해설
유대인들의 전통(1-4)
"결례 의식은 아주 엄중하게 실시한 규칙 가운데 하나였다. 먹기 전에 지켜야 할 의식을 무시하면 가증한 죄로 간주되어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범죄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의 미덕처럼 인정되었다. 정결에 대한 규칙은 무수히 많았다. 사람이 일생 동안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정도였다. 랍비의 요구를 지키려고 힘쓰는 자들의 생애는 의식적인 부정에 대한 긴 투쟁이요, 씻음과 정결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지도 않으신 쓸데없는 구별과 규칙에 정신을 빼앗기는 반면에 그들의 관심은 그분의 율법의 대원칙에서 떠나가 버렸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이 씻는 의식을 지키지 않았는데, 정탐꾼들은 이 소홀함을 비난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난하면서 그분께 나왔다. 그들은 군중이 있는 곳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진리의 기별이 특별한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임할 때에는 언제든지 사단이 그의 대리자들을 발동시켜서 중요하지 않은 어떤 문제에 대해 논란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사단은 참으로 중요한 것에서부터 관심을 돌이키게 하려고 힘쓴다. 언제든지 좋은 일이 시작되면 트집쟁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참된 실체에서 돌이키려고 형식이거나 전문적인 일에 대해 논란을 일으킬 준비를 갖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일하려고 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영혼의 멸망만을 초래할 논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가장 염려할 문제는 내가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나의 생애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느냐는 것이다"(소망, 396-397).
올바른 말씀 순종의 삶(5-13)
"예수께서는 자신이나 제자들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비난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인간이 세운 의식을 고수하는 자들을 충동한 정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어떤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당신을 찾으러 나오기 직전에 무엇을 행하였는지에 대한 한 실증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섯째 계명을 전혀 중요치 않은 것으로 제쳐 놓았지만 장로들의 유전을 준수하는 데는 엄격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성전을 위하여 재산을 바치는 것은 부모를 부양하는 것보다도 더욱 신성한 의무이므로 아무리 궁핍할지라도 이렇게 성별(聖別)한 것 중의 어떤 부분이라도 부모에게 드리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불효한 자녀는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여 자기의 재산에 고르반이라는 말을 선언만 하면 평생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그 재산을 보유할 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성전 봉사를 위해 충당하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자녀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하나님께 대한 가식적인 봉헌(奉獻)을 구실로 부모를 마음대로 불공경하고 속였다.
예수께서는 말로나 행위로써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바쳐야 할 사람의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율법의 모든 명령을 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지상 생애를 하실 때에 그분께서는 성전의 연보궤에 모든 것을 바친 가난한 여인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제사장과 랍비들이 외관적으로 하나님께 열성을 보인 것은 자기 재산의 확대를 위한 저희의 욕망을 은폐하려는 가면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우지도 않으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까지도 인습적인 편견과 랍비의 권위에 의해 그들에게 지워진 그 멍에를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못하였다. 이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본심을 폭로하심으로써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갈망하는 모든 사람을 유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힘쓰셨다"(소망, 397).
▧ 적용
1. 나의 신앙생활에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것들이 있지는 않는가?
2.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가정생활에 등한히 하고 있지는 않는가?
▧ 기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가식적인 삶을 벗어버리고, 오직 진실로 말씀의 본질에 순종하게 하소서.
kimss36@hanmail.net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길 원하신다.
삼상15:20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루를 살아야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의 말씀처럼
형식적이고 위선적이고 자기 자랑의 신앙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신앙으로의 대 전환이
필요하다.
주님 오늘 하루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나와 예수님의 참된 관계속의 안식일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이고 위선이 가득한 안식일을 지키는
안식일교인이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진실된 하나님의 종이 되길 원한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니까...
그 중심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모습보다, 속이 제대로된 사람이 되자. 오늘하루라도~
언제나 어느 선 이상의 가면을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가식적인 삶에 가장 취약한 사람이 내가 아닐까~?
어렸을때 부터 익숙해져온 안식일 교인의 삶~
'경성' 끊임없이 내 행동과 심령에 대하여 깨우쳐 돌아봄으로
진정한 말씀의 본질이 내 마음과 삶에 적용되고 있는지
주의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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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들이 자칫 잘못하면 다 형식적인 것 들이 된다.
안식일 준수, 음식물, 예배, 청년회 활동 등등 모든 것들이 순간 예수님을 놓치면
바로 형식으로 전락되고 만다.
부모님께 대한 공경도 그렇다.
매일 반복 되다보니 형식적이 된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매일 순간 순간 바라보아야
모든 형태의 행위가 진실과 진심이 될 수 있다.
십자가를 보게 하는 것도 성령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니
더러워진 마음을 다 바치고 순결한 성령님을 구함으로
진심과 열성을 얻게 된다.
(이론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중심에 있는 예수님이 희미해질때
그 정체성이 사라지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형식이나 구조나 모든 체계적인 요소들은 그 안에 중심이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움직여야합니다.
모두가 그를 묵상할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멋지게 조직해줄 것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보다는 그가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를 묵상합니다.
아멘-
예배가운데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린일이 얼마나 나에게 많은지 모른다.
참된이유, 참된 동기, 참된 원칙이신 예수를 잊지말아야겠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저들 스스로 구약의 말씀들을 잘 알고 있는 줄로 상상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비참한 과오를 범하였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그러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표면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이 아닌 이면적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경험을 해야할것이다.
매일 매순간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기위해 말씀과 기도로 생활해야겠다.
머리의 신앙이 아닌 삶의 신앙으로 우리의 신앙이 진일보하지 않으면 글에만 묶여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 같다.
'경주에 경주를' 거듭해야만이 우리가 하늘가는 말걸음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만의 관계에만 묶여있지 않음을 알아야한다.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친구도 우리의 교우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함께 속하여져 있음을 알고
함께 걸어갈 수 있고 뛰어갈 수 있는 관계임을 기억해야한다.
명절을 보내면서 안식일속에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이번 추석이 이런 우리의 신앙에 도전이 되었던 것처럼 매일의
순간에서도 이런 관계와 문제를 우리의 신앙에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 역시 어쩌면 겉모습만 중시하는 신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썩을대로 썩어있는 신앙은 아닐까...
예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나는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너무나 간사한 내 삶을 돌아보게 되며, 예수님께 매달리게 된다...
하지만 그 전통이 점차 구체화되면서, 본질적인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와전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을 구속하는 형태의 가혹한 전통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의도를 잘못 파악할 때, 그 섬기는 방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나는 어떻게 읽고, 느끼고, 전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사랑의 주님, 은혜의 주님이라고 머리로 이해하지만, 실제의 삶은 하나님을 너무 의식하고 있지는 않은지.
결국, 내 신앙의 시작이 관계형성에 있지 않고, 목적달성에 있다면 가혹한 삶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들고 있지 않은 잣대를 가지고, 자신을 재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남을 그와 똑같은 잣대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 관습을 지키기 위한 마음이 어떠한 것에 따라
관습도 좋은 믿음의 행동이 되리라 행각합니다.
오늘 일반 편지서 시간에 이와 같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말입니다.
악의 뿌리는 "돈"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마음이겠지요.
관습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관습을 행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관습을 행하느라 지나치게 열중해 버린 그 자신,
관심을 관습에게로 행하여 의를 얻고 싶은 사람의 욕망,
위선적인 마음으로 관습을 행하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겠지요.
저에게는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들이 있습니다.
관습을 진실된 마음으로 따르는,
믿음을 마음과 행동으로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간혹 있습니다. 다수가 하는 것이 진리라는 암묵적이며 때로는
인식하지도 못하는 그런 것들.. 그런 방식이 이미 교회내에도 있지 않나.
그리고 나의 삶에도 있지 않나 뒤돌아 봅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가려면 우선 성경을 정말 잘알아야겠습니다.
주님 하신 말씀대로 살고싶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역사속의 그들처럼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그외에 것들에 더
치중하면서 살고있는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으로
그분의 피묻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되렵니다.
바리새인들의 믿음으로 역행하고 싶지 않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진심이고 인간중심이다.
인자가 온것은...섬기러 온것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도 난 진심이 아닌 상태로 사랑을 운운한다.
내 자신부터 채우지 않고 뜨겁지 않은 상태로...교회에서는 전도사로서....너무 힘들때가 있다...
순종과 행함이 어색하지 않고 힘들지 않는...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교회에서 전도사로서의 일을 열심히 한다해도
지쳐만가고,, 가식적이며,,,, 낙담케 된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없이 그 어떤것도 진정한 성공은 없다...
매일을 무릎끓고 그리스도 앞에 나의 허울을 벗어버리자!!
전도사라는 직분속에서 신앙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가식적일때도 있는거 같고.......
신학도라는 자리가 부담이 될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있는 선지자들은 어떠 하였을까??
그들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성경과 하나되고 주님의 말씀에 살면 그런 이면의 내 생각도 없어질꺼라 생각한다.
즉 내가 주님안에 살때만에 이런 가식이라고 생각되는 내 생활이 진정한 주님안에서
살게 되는 것 같다..
마음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인이 되고싶다
항상 기도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때론 형식안에 있는 중식저인 내용 보단 형식에 더욱 치중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또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 하나님은 내용을 중시 하시고 , 중심을 보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그런 분앞에서 형식적인 것에 얽매여 나를 포장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솔하게 하나님께 다가가고 싶다.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믿음이 참된 믿음이고 그런 믿음의 자세가 있어야 하나님께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다.
나도 남에게 보여주는 그런 믿음이 아닌 참믿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야 겠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과 대치된다. 결과적으로 하난미 앞에 서 보면 호가연하게 드러날 일도
사람들의 이기적인 것에서부터 시작된 가면을 하나씩 달고 세상을 사는 것 같다.
나의 가면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방해하는 그 무엇이라면 오늘 나는 가면 벗는
연습을 해야한다. 믿음에 있어서 목회자는 성경의 기득권층과 같다. 이미 해 오던 믿음, 가르치던 믿음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선 믿음으로 돌아서야한다. 아주 시급한 일이다....
그간의 나의 신앙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되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찬 삶을살고 싶다.
열심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에 항상 있었으면 좋겠다.
깨끗함..................................은 행위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행위에 이른다. 손씻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심의 깨끗함 없이 이르는 행위는 위선이요, 가식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참다운 신앙을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내가 좋아하는 표현 중에 하나는
"중심을 아시는" 우리 하나님이다.
사람은 형식을 통해 내용을 보려 하지만
하나님은 형식 없이도 내용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형식을 무시하지 않으나 형식대로 살지않고
내게 있는 숨은 허물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중심을 따라 사는 주의 종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