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M 2기 일본 킨시초교회 김용훈 목사

 

킨시초 교회를 시작은 했지만, 우리 가족은 니시스가모 교회에서 살면서 양쪽 교회를 겸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킨시초 교회를 잘 돌볼 수 없었다. 책상과 의자 등 집기는 사다 놓았지만, 어떻게 전도를 시작해야 할지, 또 어떻게 예배를 운영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런데 4월이 되어 누군가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바로 킨시초 주변에 사는 교인 할머니 두 분이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면서 만났지만 나는 당신들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반복해 들었을 뿐, 내가 기대하는 희망적인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서 서로 무거운 분위기에서 대화가 끝났다. 그러나 그 중 한 분인 키쿠치 할머니가 바로 그날 저녁에 나를 집으로 초대하셨다. 일본에서는 잘 없는 일이라 놀래면서 식구들이 같이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그 할머니의 인생을 소개하고 싶다.

그 할머니는 일본이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던 때에 일본인으로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그때 소련인, 한국인, 일본인들이 사할린에 거주했는데 다정한 아버지 밑에서 불편함 없이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 사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시끄럽고, 싸움이 많은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일본이 패하고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사할린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자세히는 모르나 호적에 본인 이름이 누락되어 할머니 외에 다른 가족들은 일본으로 철수했다. 그러하여 16살 소녀는 혼자 사할린에 남게 되었다. 혼자 남은 그녀는 그래도 같은 아시아인인 한국인 사회 속에서 살게 되었고 거기서 알게 된 12살 연상의 한국인 남자와 같이 살게 되었다. 한국말을 쓰고, 한국 음식을 만들고, 세 명의 자녀를 낳아서 한국 여자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억척스럽게 일했다고 한다.

나중에 사할린에 미래가 보이지 않자, 일본 정부와 총리에게 계속 편지를 써서 1960년쯤 드디어 허가가 나고 일본말을 못하는 남편과 세 아이를 데리고 일본에 귀국하게 되었다. 먼저 정착한 곳이 홋카이도, 거기서 우리 재림교회를 알게 되어 재림교회 신자가 되었다. 나중에 도쿄로 옮기게 되었고 자녀들과 지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식으로 20년을 살아온 할머니는 언제나 인간관계가 차가운 일본 생활에 외로움을 느꼈다. 할머니도 한국인을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신앙생활에서도 한때 문서전도를 하기도 하고 자기 집에서 집회소를 하기도 했으나 할머니의 마음에 충족될 만한 교회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선교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만나러 왔고, 처음 만났지만 바로 아들처럼 대해 주시고 응원하여 돕겠다고 킨시초 교회로 출석을 하셨다. 교적도 옮겨 킨시초 신자가 되었다.

키쿠치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 양쪽을 이해하고 있는 분이어서 교회에 출석함으로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사이를 잘 연결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해주고 있다. 2005년 한 해 막막할 때에 그분이 있었기에 킨시초 교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연세는 높지만, 아직 젊은이보다 건강하고 경제력도 있어 킨시초 교회의 기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인구 많고 사연 많은 도쿄의 어딘가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많은 키쿠치 할머니 같은 분들이 있을 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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