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우리가 본 대로, 1888년 이전에는 재림교회와 구원의 복음주의적 이해 사이의 격차가 문젯거리가 되었다. 재림교인들은 독특한 재림 신조들에 관하여는 강했지만, 그들의 설립자들이 타 그리스도인들과 공유하던 위대한 복음적 가르침에 대하여는 취약하였다. 엘렌 화잇은 존즈와 왜고너를 이 난관에 대한 교정책으로 보았다.
당시에 행위 중심적인 지도자들에 반해 왜고너는 자신의 교회가 역사적인 구원의 교리에서 떠났음을 인지하였다. 엘렌 화잇도 어떤 사람들이 존즈와 왜고너의 가르침-그들의 “기별”이 “새로운 진리가 아니고, 바울이 가르쳤으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친 동일한 것”-을 “이상한 교리”라고 본 것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시하며 같은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원고 27, 1889).
율법과 복음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바울, 루터, 웨슬리의 해석을 반영한다는 왜고너의 말은 그것에 “셋째 천사의 기별의 심장부에 한 발짝 더욱 근접한 것”이라고 덧붙임으로 더욱 심오하고 통찰력 있는 것이 되었다. 엘렌 화잇도 같은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이들이 “우리가 너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집착한다는 두려움을 표현하였을 때,” 화잇 부인은 여러 사람들이 자신에게 편지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셋째 천사의 기별인지 문의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이것이 참으로 셋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응답하였다(RH 1890. 4. 1.).
그 말이 어떤 사람들을 혼미하게 하였다. 정확하게 그녀는 무슨 말을 한 것인가?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하여 다음 며칠 동안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 14장 12절이 재림교회 역사의 중심적 구절임을 상기할 수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재림교인들이 이 구절을 그들의 교단을 묘사하는데 사용하는 뜻을 깨닫고 미네아폴리스의 <저널> 지의 한 기자는 이 구절을 자기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흉물스런 자만이든지 숭고한 신앙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재림교인들은 물론 이것을 “숭고한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1888년 위기의 양편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미네아폴리스의 이견이 요한 계시록 14장 12절의 의미를 중심으로 나뉘었다는 것을 더욱 명백하게 인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