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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3.
베이츠는 교회 목사를 통해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가르침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그러나 이 개념이 1839년까지는 별로 그의 마음속에서 발전이 없었다. 그 해 가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1843년경에 오실 것이라는 윌리엄 밀러의 설교에 관하여 들었다.
베이츠가 이 생각에 대해 반대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밀러가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대단히 많은 성경절을 사용하였다고 귀띔해 주었다. 곧 베이츠는 재림에 관한 일련의 집회에 참석하였고 "구세주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많은 것들을 보여 줄 수 있음에 대해 놀랐다." 첫 번 강연 후 귀가길에 그는 아내에게 "이것은 진리"라고 선언하였다.
그 다음 그는 밀러의 <1843년경에 있을 재림에 대한 성서적, 역사적 증거>를 읽었다. 베이츠는 전심으로 밀러의 가르침을 수용하였고, 밀러의 재림 운동을 포용하고 참여하여 후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될 사람들 중 첫째가 되었다. 밀러주의가 곧 베이츠의 삶을 주관하였으며, 이전 그가 사회를 개혁하는데 바친 시간을 차지하였다. 이 시점에서 친구들이 베이츠에게 왜 더 이상 절제와 노예 해방 모임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였다. 베이츠는 친구들에게, "내 대답은, 구세주 재림의 교리를 포용함에 있어, 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이 사건을 위해 준비하는데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함과, 이 교리를 수용한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절제와 노예 제도 폐지의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베이츠는 그의 친구들에게 "문제의 근원을 다룰 때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사실, 여러 개혁 단체들이 제거하고자 한 악습들은 죄악적 삶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은 "갑작스럽고 완전히 악을 끝낼"것이었다. 그래서 밀러주의는 베이츠에게 "궁극적인 개혁"이 되었다. 그는 "부패한 인류가 부패를 개혁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유일하게 참되며 영구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초장부터 베이츠는 1840년에 개최된 첫 총회를 소집한 16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또한 1842년 5월 모임의 의장으로서 밀러주의의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이러한 책임들이 그로 하여금 1840년대 후반에 안식일 준수 재림교를 태동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베이츠의 삶을 걸음마다 인도하셨다. 또 이분이 동일하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 우리의 임무는 앞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도하심을 매일 따라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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