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4
미네아폴리스에서 있었던 다니엘 7장의 열 뿔에 관한 토론에서는 신학적 소득은 별로 없이 긴장만 고조되었다. 스미스는 이 주제를 토론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하다.”라며 “오래된 진리를 손상하는 것”이라 하였다. 존즈는 특정 주제에 대한 스미스의 무식에 대해 자기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고 선언하였다. 그 때 엘렌 화잇은 “너무 날카롭다! 존즈 형제, 너무 날카로워!”라며 자제를 호소하였다.
한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진정한 신학적 진전이 이루어졌다. 1888년 총회 때의 흥미 있는 사실 한 가지는 비록 갈라선 양편 모두 시작할 때는 갈라디아서의 율법에 관한 문제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회합에서 나온 결과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새로운 강조였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많은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 주제가 새로운 방향으로 진전된 것에는 왜고너의 공로가 컸다. 그는 갈라디아서의 율법만 문제 삼지 않고, 율법과 복음의 양면적 관점에서 보다 큰 구원의 문제를 제기한 후 갈라디아서를 그런 관점에서 토론했던 것이다.
그래서 왜고너는 비록 복음과 율법을 주제로 아홉 번의 강의를 하였으나 처음 다섯 내지 여섯 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다루었다. 갈라디아서를 더 구체적으로 토론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 결과 갈라디아서 문제는 뒤로 밀려나고 구원이란 주제가 전면에 나타났다.
왜고너의 신학에 따르면, 십계명/몽학 선생이라는 법은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하려고 그리스도께로” 데려간다. 그 점에 대해 엘렌 화잇은 그를 지지하였다. 그녀는 대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저 의사[왜고너]가 우리 앞에 제시한 그리스도의 의와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경험의 전 기간을 통해 보여 주시기를 기뻐하시던 빛과 완전히 조화된다.”(원고 15, 1888)
이 발언으로 엘렌 화잇은 재림교회 신학에 왜고너가 공헌한 최대의 업적을 자기가 본 대로 밝혔다. 왜고너는 십계명이라는 율법의 복음적 기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율법과 복음 간에 가교를 놓았던 것이다.
율법은 아직도 우리의 삶에서 그런 역할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상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용서와 칭의를 찾아 그리스도께로 가도록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