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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의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계 21:12~14).
하나님은 정말 각자의 생애에 상세한 계획이 있으실까? 정말로 내 생애에 하나님의 완벽하신 뜻 즉, ‘최선의 결정’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는 같은 목적지에 도달케 하는 여러 갈래의 길이 마련되어 있을까? 어떤 이들은 두 갈래 길에서 옳은 길 하나만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한번은 내가 살던 미시간 주에서 플로리다 주까지 장거리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가장 좋은 길은 모두 테네시 주 차타누가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시간에서 차타누가까지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나는 인디애나폴리스를 거쳐 내쉬빌로 가서 차타누가를 가로질러 가거나, 내쉬빌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렉싱턴을 통과하여 남쪽 녹스빌을 지나 차타누가로 가든지, 미시간이나 인디애나폴리스 동쪽으로 가서 오하이오로 들어간 후 신시내티로 내려와 녹스빌을 거쳐 진행하는 등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다양했다.
거리를 계산해 본 후 내가 사는 미시간 주에서 차타누가까지 가장 가까운 거리는 내쉬빌을 통과하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사우스벤드에서 인디애나폴리스까지는 길이 잘 막히고 신호등도 많고 또 혼잡한 시간에 내쉬빌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오하이오까지 80번 하이웨이로 들어가면 초고속 수퍼 하이웨이로 달릴 수 있지만 100마일 정도 돌아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한편, 렉싱턴으로 하여 내쉬빌을 피해 가는 길도 있지만 40마일 더 먼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매사에 완벽한 정로를 가지고 계실까? 아니면 우리 삶의 목적에 따라 좌우되는 것일까? 우리 삶의 목적은 새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살기 위한 성품 계발이 아닌가? 지름길이나 평탄한 길 혹은 ‘최상의 길’이 언제나 우리 성품을 계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뒷길 또는 구멍이 파인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통과할 때 우리 성품이 다듬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걷는 어떤 길도 바르게 인도하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금도성과 불 못은 명백히 대조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우리를 앞서 가셨으니 생명의 길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분만을 따르겠느냐 하는 것이 요점이다.
주님, 거룩한 도성에서 주님과 함께 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저희 온 가족과 친구들도 함께 살기 원합니다. 오늘 제가 가는 길의 인도자가 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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