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lasting-gospels.gif
letter-text.gif
line.gif
guide_img.gif

6월 25일 수요일 - 제자가 된다는 것2

guide_img.gif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제자로 사는 삶’에서 또 한 가지 불편한 말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 이것은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우리를 포함하여)에게 달갑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각 사람이 져야 할 십자가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초기 제자들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 또는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이 21세기 사람들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다.’라는 말뜻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라는 말에 등골이 오싹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또 남편의 잔소리, 아내의 바가지, 신체 장애 등 다소 불만스럽거나 불편한 것을 참아 주는 것쯤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만평처럼 우스꽝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말하는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입니다. 신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아를 못 박는 것입니다. 삶의 수단과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엘렌 화잇은 이것을 가리켜 “자아를 굴복시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정로, 43)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제임스 데니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죄는 저절로 생기지만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죄마다 도덕적 선고를 내려서 처단해야 한다.” 죄를 죄라고 선고하는 것은 의지를 발휘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가능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라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것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며(6절),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삶의 중심으로 삼아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는 그런 죽음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을 물속에 잠그는 침례는 영적인 죽음이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은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1~11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