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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목요일 - 평생 교인으로 지낸 사람의 구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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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5~30).

잔치를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맏아들도 그중 하나입니다. 19세 때 처음 교회에 다니면서 이 비유를 읽었을 때 저는 맏아들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으니 기뻐해야 한다고요? 그 녀석은 자기 몫을 탕진하고 돌아와 이제 내 재산까지 빼먹으려고 합니다. 이게 기뻐해야 할 일인가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동생이 무엇 때문에 집에 돌아왔겠습니까? 궁핍하고 배가 고파서입니다. 안 그러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까요. 맏아들이 화를 내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딴 놈에게 잔치라니요.” 그는 아버지에게 성을 냅니다. “꼴에 맞게 대우를 하셔야지요. 저놈은 손발이 부르트게 일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맏아들이 멋지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받아 마땅한 만큼만 주라.’는 것입니다. 행한 만큼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논리는 다릅니다. 필요한 것을 주고, 받아 마땅하지 않은데도 주는 것,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버지의 논리입니다.
이 착한 맏아들은 꼬박꼬박 교회에 출석했을 망정 이 같은 논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분통을 터뜨립니다. “저는 아무리 짜증이 나도 아버지가 시키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잔치 한 번 열어 주신 적이 있었나요? 이 경건한 생활이 좋아서 한 줄 아십니까? 매 안식일 교회에 있는 1분 1초가 지긋지긋했다고요. 그래도 안식일은 어쨌든 지켰어요. 대우받아야 할 사람은 저 아닌가요.”
그의 본심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여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인간이 있습니다. 제가 들판에서 하루 종일 고달프게 일하고 돌아와 손톱 밑에 낀 거름 때를 씻는 동안 이놈은 창녀들과 놀아났습니다. 누군 그러고 싶지 않아서 안 한 줄 아십니까. 그냥 꾹 참고 이 빌어먹을 농장에서 노예처럼 살았던 거죠. 정작 잔치를 즐길 사람은 저인데 한 번도 그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비극입니다.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집을 떠나거나 교회에 빠져 본 적이 없는 이 모범적인 아들, 모든 특권을 똑같이 부여받은 그 아들이 실제로는 아버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비극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도 자녀가 아니라 품꾼의 정신으로 일평생을 보내는 것보다 더 끔찍한 허송세월이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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