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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일요일 - 어긋난 입맞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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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마 26:47~49).

왜 입을 맞추었을까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 달라고 유대의 지도자와 성전 병사들이 유다에게 요청했기 때문일까요?
얼마 전 그분은 성전을 정결케 하고 환전상을 쫓아냈습니다. 성전의 병사나 다른 무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성전 뜰에서 날마다 가르친 사람을 그들이 못 알아볼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결코 예수님의 신상을 확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작 그들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몰려든 군중과 예수님의 인기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을 손쉽게 체포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는 유다가 그들에게 이미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입을 맞춘 것일까요? 본문 자체는 키스를 했다고 암시합니다. 48절에서 ‘입맞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필레오’인데 49절에서는 ‘카타필레오’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에 의하면 카타필레오는 연인들이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나누는 키스를 뜻합니다. 
그러면 마태는 왜 용어를 바꾸어 가면서 표현했을까요? 단순히 신상을 확인하기 위한 입맞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굴곡진 유다의 마음 더 깊은 곳에는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의 입맞춤은 자기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한 제자의 입맞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분명 예수님이 그 상황에 자극을 받아 메시아로서의 힘과 권위를 행사해 주기를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유다가 기대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자괴감을 느낀 유다는 이야기에서 자취를 감추고 마침내 자살로 삶을 끝냅니다. 예수님이 사로잡힌 이후에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리에도 증인으로 나설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둔 것은 철저한 환멸뿐입니다.
자기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헌신한들 자기 방식으로 성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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