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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월요일 - 용서의 한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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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1~35).

용서의 한계에 대해 베드로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대답은 세 번째 장면에서 그 절정에 도달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도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33절). 똑같은 교훈이 산상 수훈에서도 나타납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강한 어조를 약화시키려는 사람, 여기 나타난 날카로운 대조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명한 대조야말로 하나님의 크나큰 자비를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은 자비를 기대하신다는 점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1만 달란트는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100데나리온을 갚으려면 100일 만 일하면 됩니다. 그러나 1만 달란트를 갚으려면 매주 7일 꼬박 일해도 16만 4,383년 이상이 걸립니다.
100데나리온은 호주머니에 넣어서 갖다 주면 됩니다. 반면 1만 달란트를 운반하려면 짐꾼 8,600여 명이 각각 동전 27킬로그램을 짊어져야 하고 1미터 간격으로 걸어도 행렬의 길이가 9킬로미터에 이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와 같은 대조를 이렇게 잘 요약했습니다. “인간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해 주신 것에 결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요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그분이 탕감해 주셨다면 동료가 우리에게 진 빚 역시 우리도 탕감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 것에 비하면 우리가 용서해야 할 것은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제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에 대한 자신의 질문에 답을 얻었습니다.
베드로나 우리나 해답은 숫자 계산이나 극단적인 도덕적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로 고개를 돌려 우리의 자유를 위해 우리 빚을 갚으신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람들을 대할 때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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