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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 21:22, 23).
우리가 예수님(어린양)을 그 거룩한 성에서 만나게 될 때 그 감격이 과연 어떠할까? 그때 우리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갈까? 그리고 어떤 감정일까? 내가 짐작건대, 우리를 위하여 겪으신 그분의 고난을 확실히 그려 볼 수만 있다면 감사의 샘물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와 영원토록 풍성히 흘러넘치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그저 조금 감지할 뿐이지만 이것으로 감사의 시작점이 되게 할 수 있다.
여러분이 7월 무더위 땡볕 아래서 하루 14시간이라는 고된 밭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데 하루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그대의 형편을 알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대신 그 일을 하겠다고 한다. 그대는 집에서 편히 쉬며, 하루 종일 내가 어떨지 생각해 본다. 내가 일터에서 돌아와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할 때, 그 말을 들은 그대는 “알았어, 친구야! 내 대신 일해 줘서 정말 고마워.”라고 대답하였다고 하자. 그대가 정말 내 고통을 알 수 있을까? 내가 매 순간 얼마나 지루하고, 매 발걸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 수 있을까?
이번에는 집에 있는 대신 직접 일터에 따라 나왔다고 하자. 실제로 14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내가 몸을 굽혀 힘든 걸음을 옮기고, 손은 곡괭이질로 물집이 잡히고, 얼굴은 땡볕에 그을린 모습을 보았다고 하자. 이제야 좀 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직접 육신적 고통을 겪지는 않았지만, 내가 겪는 고통을 보지 않은 때보다 더 잘 공감할 것이며, 그날 내 자신을 그대에게 선물로 준 일을 가슴 깊이 기억할 것이다.
십자가형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몇 대나 맞으셨을까? 그분의 살이 찢어져 떨어지는 것을 느끼는가? 그분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짐작되는가? 가시 면류관이 마치 월계수 관처럼 그 머리 위에 순하게 씌워졌을까? 아니면 속살을 뚫고 깊이 박혔을까? 핏방울이 작은 내를 이루며 그의 몸과 얼굴로 흘러내렸을까? 그분이 그 아픔을 어찌 견디셨을까? 성경은 그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사 52:14).
친구들마저 모두 배반하여 떠난 후 쓴 이 노래에서는, “그분의 눈은 그 날 관중을 향하였었네. 그러나 때마침 앞을 바라보셨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그분 마음속에 내가 있었네.”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그분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비로소 영원한 감사의 기본이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사귈 수 있을 때를 고대합니다. 그때까지, 저는 주님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에 매일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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