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 19:16, 17
재림교인들은 오랫동안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있었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존즈와 왜고너는 실제로 무엇을 가르쳤는가? 또한 스미스와 버틀러는 어떤 점을 고칠 필요가 있었는가? 우리는 몇 일 동안 이 질문의 대답을 살펴 보겠다.
어쩌면 이 주제로 가장 잘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유라이어 스미스의 1888년 1월자 <리뷰> 사설을 통해서일 것이다. 1월에 “주요 문제”라는 세 기사를 통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목표는 재림의 마지막 선포를 알리고, “이 마지막 시험하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노력의 한 목표였다.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개심되어 하나님의 모든 분부들을 깨달은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인도되지 않는다면 결과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었다.” 스미스는, 요한 계시록 14장 12절의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를 인용할 때, “지키라”는 단어를 강조함으로 “주요 문제”를 셋째 천사의 기별과 연결시켰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멈추어야 한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가? 스미스가 단언한 것처럼 순종을 통하여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통하여서인가?
스미스는 1888년 1월자 그의 마지막 사설 “영원한 생명의 조건들”에서 다시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논평을 젊은 부자 법관이 그리스도께 질문한 것에 근거하였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성경의 대답은, “회개하고, 믿고, 순종하면 살리라.”로 요약될 수 있다며, 그것이 예수님의 반응이었다고 스미스는 주장하였다. 결국, 예수께서는 젊은 부자 법관에게,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스미스는 “바리새인들의 의의 문제는” 그들이 “도덕률”에 관계하여 가납될 수준의 “도덕적 성품”에 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라고 계속 주장하였다.
젊은 부자 법관의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조셉 베이츠의 잘못된 지도를 따르면서, 스미스와 그의 동료들은 율법주의에 빠졌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신약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