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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 안식일 - 실망 앞에서 발견하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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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이제 예수님에게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들에게까지 무언가 끔찍한 일이 닥치려 한다는 사실을 가장 둔감한 제자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의 안녕은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길한 내용만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선생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대가’가 고작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처럼 모든 것이 암담하고 절망스럽던 때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상황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고아”라는 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오르파노스’를 번역한 것인데 영어 ‘오펀(orphan, 고아)’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라는 번역은 꽤 정확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이러한 마음이셨습니다. 2절과 3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라고 다짐하셨습니다. 다시 오시는 일은 세상 끝 날 재림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는 훨씬 더 빠른 등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께서 죽어 장사될 것이므로 (예수님이나 그분의 기별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세상은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리라”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이중적 의미에서 고아처럼 버림 당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가신 지 삼 일 만에 제자들과 다시 만나셨습니다. 둘째, 육신으로는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돕는 자’, 다시 말해 ‘보혜사’를 통해서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약속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희도 살아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를 그 추종자들과 함께 나누시겠다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정수입니다.
제자도에 관한 이 짧은 묘사는 저 자신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도 의미심장합니다. 저도 고아처럼 외롭고 절망적이고 버림 당한 심정을 느낀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은 나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이 든다고 진짜 고아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쁜 소식입니다. 저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와 부활하신 주님과 능력이 충만하신 보혜사 성령님과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절망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예수께 돌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이루신 큰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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