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흔네 번째 이야기 -  20세에 미군 대령 계급장을 단 한국인 청년

고한실 박사는 1972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의 대통령 아홉 명을 위한 법률자문으로 일했다. 17세에 일본고등문관 사법시험 사법과에 응시하여 일본의 최연소 수석합격의 영광을 누린 그는 다시 20세에 미국의 사법시험에도 최연소 합격을 했다. 그가 "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월간 시조 2011년 1월호(32-35쪽)에 게재한 것을 이곳에 옮겨 실었다.

재림교인을 이끄시는 인도의 손길

나는 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되었나? 

 

나는 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되었는가? 한마디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 : 8). 또 레위기 19장 3절에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도 안식일을 지키셨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 : 16).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된 경위

 

나는 12살 때 고국을 떠났으니 올해로 이국 생활이 73년 차가 된다.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 말을 다 잊고 살았다. 1970년 1월 나는 모국어를 배우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한인 침례교회(김현철 목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침례교회에서 장로교회로 그리고 장로교회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로 옮긴 나의 인생 여정은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섭리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제주도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에서 출생했다. 한학자이신 아버지(山音 故 高珪南)는 향교 반수를 지낸 빈곤한 농부였고 어머니(故 金雲河)는 열렬한 불교 신자였다. 내가 네 살때 어머니가 읽던 불경을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네 살, 다섯 살 때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종아리에 피가 날 정도로 많은 매를 맞았다. 이유는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멋대로 구는 개구쟁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쌈지 담배를 피우려다 들켰는데, 아버지는 피우는데 왜 나는 못 피우느냐고 따지다가 매를 맞았다.

나는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여섯 살 때인 1932년 4월경 제주도 한라산록에 있는 관음사라는 절로 보내졌다. 청정도량을 청소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아침 식사는 여섯 시, 점심은 열두 시, 저녁은 여섯 시였다. 하루는 아침 청소를 끝내고 졸다가 3분 정도 늦게 식사하러 갔는데 내 자리에 있어야 할 밥과 반찬이 아무렇게나 장판 바닥에 놓여 있었다. 화가 난 나는 부엌으로 가서 물 양동이에 물을 담아다가 내 밥이 있는 장판 바닥에다 물을 부어 버렸다. 주지 스님을 비롯하여 모두가 일어섰다. 물이 방 전체에 번졌기 때문이다. 주지 스님의 호출을 받고 주지 스님 방으로 갔다.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방바닥에 내 밥이 놓여 있었으니 이 장판 방은 내 밥그릇이 아닙니까? 시간이 늦어서 물 말아 먹으려고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주지 스님은 한참 생각하신 후, 그럴듯도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를 불러 엄중히 경고하셨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 1933년 5월경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대불당을 청소하다 부처님 좌석 아래에 있는 골방에서 부처님께 드릴 떡과 과일들을 발견하고 배고픈 때라 그 떡과 과일을 먹고 그 자리에서 잠들고 말았다. 나는 현장에서 잡혔고 주지 스님은 죄 없는 어머니를 불러 도저히 이 애는 감당하기 힘드니 데려가라고 했고 결국 관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일본에서 법률을 공부하게 되다

 

나는 부모님께 간청, 또 간청 끝에 1935년 4월부터 화북 소학교에 입학했다. 월반 또 월반 끝에 1938년 2월 10일 졸업식(3월 25일)을 44일 앞두고 일본 동경부립 제일중학교(5년제)를 지원하고 고향을 떠나 관부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다시 동경행 완행열차를 타게 되었다. 화장실에 갔다 와 보니 일본 남자가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자리는 제가 앉았던 자리입니다.”라고 했더니 “뭐! 이 새끼 조센징(‘개새끼’라는 뜻)” 하며 폭행을 가해 왔다. 무서워서 화장실로 피하여 울며 생각했다. 고향을 떠날 때 부모님은 의사가 되라고 했지만 나는 법관이 되어 저런 못된 놈들 버릇을 고쳐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폭행한 그 사람에게 감사하다. 그가 나를 폭행하지 않았다면 법관이 되겠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경에 도착해서 오짜로미스 역에서 내려 방을 찾았다. 첫 번째 집, 두 번째 집, 세 번째 집 다 거절당했다. 그때 나는 기도를 했다. 나에게 방을 빌려 줄 사람이 있을까 하면서 길가에 앉아서 방을 얻게 해 달라고 또 한 번 기도했다. 네 번째 집 할머니에게 “나는 동경부립 일중 지원생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수험표를 보여 드리며 “할머니와 한방에서 같이 자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 할머니(이름 : 오가와 하나)는 나의 수험표를 보고 또 보신 후에 왜 부립 일중을 지원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등록금이 싸서 지원했다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나의 요청을 받아 주셨다.

드디어 입학 시험날이 왔다.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자 할머니는 “오늘 시험 잘 봤냐?”고 물으셨다.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합격자 발표하는 날 학교에 가서 발표를 보고 와 방구석에 정신없이 앉아 있을 때 할머니는 “그것 봐.”라고 하시며 그 학교는 아무나 들어가는 학교가 아니라 수재 중에 수재들만 들어가는 학교라고 말씀하셨다. 동경에는 좋은 학교가 많으니 다른 학교를 지원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할머니! 합격은 했는데 오늘 오후 3시까지 등록금 2원 50전(지금 돈으로 2만 5천 원)을 납부하라는데 그 돈이 없어서 고민 중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었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학교에 가서 내 수험번호 7725번(250명 모집에 1만 1,560여 명 지원)을 확인한 뒤에야 “너 정말 합격했구나!” 하시며 나보다도 더 기뻐하셨다. 접수계에 가서 일주일 연기요청을 했는데 1분도 연기 안 된다고 합격자는 자동 취소된다고 하였다. 안에 들어가셔서 큰 책상에 앉으신 분(교감 선생님)께 요청했으나 접수계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할머니는 교감 선생님께서 등록금을 빌려주시면 3일 내에 갚아 드리겠다고 요청을 하셨다. 그리고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그 돈을 꿔서 등록금을 납부했다. 그날 저녁에 할머니는 팥밥(축하하는 밥)을 지어 옆집 사람들을 불러 “부립 일중에 합격한 우리 집 학생”이라고 나를 자랑하셨다.

 

진리를 찾아서

 

여기까지 회고해 보니 내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길목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인생 여정은 줄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과 동행한 것임을 확신한다. 내가 모국어를 배우기 위해 침례교회를 다닌 지 1년쯤 되었을 때 담임목사와 원로목사 A 씨와의 불화로 교회가 갈라지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침례를 준 김현철 목사님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미국남침례재단(미국에서 제일 큰 종교 재단)’ 한국 부장으로 영전해 감으로써 나는 장로교회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집사, 장로, 수석장로가 되었다. 1978년 개신교회들이 모여 ‘워싱턴한인교회협의회’를 창설하였다.

그때 나는 법대 교수였기에 교육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당시 워싱턴에는 사이비 종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워싱턴 교회협의회(회장 정현철 목사)에서 한 번, 워싱턴 YMCA(이사장 고한실 박사)에서 한 번, 재미한국문화협회(회장 고한실 박사)에서 한 번씩 사이비 종교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그 대상은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였다. 세미나가 끝나갈 때쯤 Y 목사가 “안식일교회도 이단”이라고 말하였다. 그 세미나에 참석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권경모 장로님이 일어나서 “안식일교가 무엇이 이단인지 성서적으로 답변해 달라.”고 요구하자 정작 Y 목사님은 답변을 못하고 난처해하였다. 사회를 보던 나는 권경모 장로님께 “내가 책임을 지고 답을 드릴 테니 연구할 시간을 주십시오. 10년 내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요청하였다. 그때부터 다니던 장로교회도 나가지 않고 안식일교회의 모든 서적을 구입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런 의협심은 진리에 대한 탐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다.

일본 최고의 명문 중학교 신입생이 되어 의사가 되라는 부모님의 뜻과는 달리 법관이 되기 위한 절차를 다시 밟기 시작했다. 동경 가는 기차 안에서 조센징이라며 수치를 당하고 법관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또다시 정의와 진리에의 도전 정신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입학하는 날부터 도서관에 가서 참고서와 육법전서를 빌려 읽기 시작했다. 중2 때 고등학교 입학자격전형 시험에 합격하여 중1 동기생들이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갈 때 나는 제일고등학교(현재 동경대학 교양학부) 1학년생이 되었고, 고2 때 대학 입학자격전형 시험에 합격했다. 중1 동기생들이 중학교 5학년으로 진학할 때 나는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1학년생이 된 것이다. 중1 때부터 읽기 시작한 육법전서는 거의 암기한 상태였다.

고향을 떠난 지 5년째 되던 1943년 일본고등문관 시험 사법과에 응시해서 최연소(17세) 수석합격이라는 영예를 얻었다. 1945년 1월 20일 일본 육군에 소집되어 갑종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 병참부대 마쓰도 부대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60여 명의 부대원 중 나이가 제일 어리지만(19세) 부대원 중에서 계급은 제일 높은 소위였다. 1945년 7월 육군 중위로 진급했다. 동경제대 동기생이며 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친구 A 군은 일본천황을 지키는 고노에 사단 사령부에 배속되어 있었다. 나는 쉬는 날 A 군을 방문해서 거기서 미국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1945년7월 27일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이 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1945년 8월 16일 일본 육군 법무관으로 ‘뉴기니아’로 가게 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나는 병참 부대원들의 요구에 따라 8월 16일 오전 9시에 재고품들을 다 나눠 주고 말았다.

8월 17일 일본 헌병대에서 와서 재고품을 신고하라고 했을 때 “없음.”, “없음.”으로 신고했더니 일본 헌병대에서 미군 헌병대로 이첩되었고 거기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27일 오전 8시 30분경 미군 헌병이 체포영장을 가지고 하숙집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유엔군 총사령부 법무관실로 인계되었다. 그때 일본은 전국 어디에서도 쌀밥, 고기, 과일 등은 구경하기 힘든 때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체포해 간 그날부터 유엔군 총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공짜로 배불리 먹게 하셨고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게다가 대우도 무척 좋았다. 그뿐 아니라 미국 로우스쿨처럼 미국 연방헌법에서부터 캘리포니아 주법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정하여 미국에서 온 미육군 법무관들이(미국 법대 교수, 판사, 검사 등) 경험에 따라 나를 지도해 주었다. 1946년 초 ‘키-난’ 유엔 고등검찰총장이 나에게 미국 사법 시험을 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나는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미국까지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키-난 총장은 시험관들이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부’까지 와서 시험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동경에 있는 유엔군 총사령부는 일본 땅이 아니라 미국 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수일 후 시험관들이 와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부에서 시험을 치렀다. 미국 사법 시험 발표 전날, M 소장은 오늘부터 너는 무죄라고 하였다. 내가 오늘부터 무죄라면 어제까지는 죄가 있었다는 말인데, 내가 여기 오던 날부터 나는 무죄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발표 날이 다가왔다. 상쾌한 마음으로 유엔 법무관실로 향했다. 약 60여 명의 유엔 법무관들이 모여 있었다. 키-난 총장은 고 중위는 일본 사법 시험에 최연소 수석합격을 했는데 미국 사법 시험에서도 최연소(20세) 수석합격을 했다며 축하해 주었다.

그 다음 날 M 소장은 나더러 일본 육군 중위였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더니, M 소장은 2계급을 특진시켜 미 육군 소령으로 임명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노! 미 육군 대령으로 해주시오!”라고 당당하게 요청하였다. 서로 옥신각신하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심판을 받으러 맥아더 원수(5성 장군)에게 가게 됐다. 인사한 후 맥아더 총사령관은 “말썽꾸러기가 너냐?”고 물었다. 나는 “노! 말썽꾸러기가 아니고 준법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맥아더 총사령관은 대령을 주장하는 법적 근거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며 유엔 법규를 보여 주었다. 한참 법규를 보던 맥아더 원수는 “법규에 따라 대령으로 모셔야지.” 하고는 “고 대령! 고맙소!”라는 말을 다. 법규에는 “두 나라 사법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자는 대령으로 임명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었다.

당시 내 나이 20세였다. 그때 맥아더 원수 앞에서 “No!”라는 말을 할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나의 인생길을 굽이굽이 인도하신 하나님이 당시에도 나와 같이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바위같이 견고한 유엔 총사령부의 오성 장군 앞에서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근거는 바로 오성 장군도 지키고 준수해야 했던 유엔군 법규였다. 나는 법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법에 내 목숨까지 던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성경의 안식일 법규를 발견한 이상 내가 일요일을 지키는 교회에 몸을 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미련 없이 이단이 아니라 오히려 정통 교단인 안식일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맥아더 총사령부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1946년 3월 1일부로 미육군 법무관, 유엔군 고등검찰관 미 육군 대령 고한실이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유엔군 고등검찰관은 일본 천황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 육해공군 대장, 국회의장 등에게 체포영장을 발부 및 조사할 권한이 있었다. 나는 일본 전 후생장관 기시 노부스게 장관 담당 검사로서 유엔 고등검찰관의 직무를 수행했다. 나는 기시 장관에게 6개월 형을 구형했고 재판장으로부터 6개월 선고를 받았다. 기시 장관이 형 만기 석방되던 날 집으로 가기 전에 법무관실에 들렀을 때 나는 기시 장관에게 판결 날로부터 1년 후에는 공직에 취업할 수 있다는 증명서를 써 주었다. 그는 나의 동경제대 선배로 우수한 인재였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그 선배는 일본 국무총리가 되어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가 나는 당신네 사람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하자 박 대통령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고 기시 총리는 그는 유엔군 고등검찰관이며 고한실 대령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중정부장을 통하여 고한실 박사를 찾아냈고 박정희 대통령은 나를 초청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1974년 8월 15일 경축 행사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의 초청을 받고 행사장 귀빈석에 앉아 문세광의 총 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미국 일곱 대통령의 법률자문위원

 

1956년 일본을 방문한 닉슨 부통령은 유엔 고등검찰관 고한실 대령을 찾았다. 닉슨 부통령과 점심을 같이 하던 자리에서 그는 나를 미국으로 초청하였다. 그 후 1968년 미조리 대학 교수로 근무할 때 닉슨은 미국 제3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축전을 보냈더니 취임식 초청장이 날아왔다. 대학 총장이 나보다 더 기뻐하였다. 12년 6개월 만에 만난 닉슨 대통령은 외국인으로서 미국 헌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으니 고 박사가 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나는 대통령께서 협조해 주시면 해 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로부터 약 3년 후인 1972년 5월에 <미국 법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How American Laws are Made?)>라는 책이 나왔다. 서문은 현직 닉슨 대통령이 써 주었다. 미국 국회도서관 우량도서 #72-817200호로 등록되었다.

그로부터 닉슨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통령 법률자문위원이 되었고 그 후 일곱 대통령의 법률자문위원 또는 법률고문이 되었다(닉슨:1972~74, 포드:1974~77,카터:1977~81, 레이건:1981~89, 아버지 부시:1989~93, 클린턴 : 1993~2001, 아들 부시:2001~09).

나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우리말을 잊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한인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례교회와 장로교회를 거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재림교회는 이단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정통 교회이다. 나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1996년 9월 아내와 함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MD 중앙교회(담임목사 최통령)를 찾아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되었다.

그해 12월 중순경 워싱턴 한인교회협의회 회장단 목사님들의 초청을 받고 점심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때 중진 목사님 한 분이 “고 박사! 왜 이단으로 갔어!” 하기에 나는 여러 목사님들께 “내가 이단으로 간 것이 아니라 이단에서 빠져나왔습니다.”라고 했더니 “우리가 이단이란 말이오?” 하고 물었다. “예,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출애굽기, 레위기 등 그리고 정통 교회로 바꾸십시오! 원하시면 내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일요일에서 토요일 안식일을 준수하게 되면서 내 나름대로 미국의 유명 목사님들께 물어보았다. 그런데 안식일교회가 이단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국의 유명 목사님 중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도 포함된다.

어느 날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안식일교회에 대하여 10년 연구 끝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이 되었다고 했더니 훌륭하다며 축하해 주었다. 미국 연방 상원원목은 목사님이라면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은 자리이다. 배리 C.블랙 목사님이 상원 원목이었다. 블랙 목사님은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리차드 덴지그 미 해군 장관의 추천으로 미 연방 상원 제62대 원목으로 취임했다. 해군에서 27년 군목으로 근무한 해군소장 출신이었다. 미 해군에 군목이 천 명 정도 되는데 이들의 총감독을 역임한 분이 바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목사님인 것이다. 한국에 계시는 안식일교회 성도님들도 정통 교회 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미국에서 제일가는 목사님이 안식일교회 목사님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활기차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는 바이다

 

고한실 법학 박사,

미국의 일곱 대통령(닉슨 대통령부터 부시 대통령까지)의 법률자문위원 및 법률고문으로 활동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