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민 교수의 "진화의 거짓말" 

 

 

제 7 장. 죽음 - 저주인가 축복인가?

죄와 죽음?

누군가 당신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자. “ 당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며 죄를 자백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죄? 왜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겁니까?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렇다하는 분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맞지가 않아요. 만약 그렇다면 세상의 온갖 죽음과 고통을 보세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자,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복음, 죄와 죽음

무엇이 복음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완전하게 만드셨다. 그 분은 처음의 두 인간,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 동산에 두셨다. 아담과 하와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아주 아름답고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께서는 선택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프로그래밍된 반응이 아닌 이성적인 행위로서의 사랑을 원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반역하기로 결심했으며, 반역은 죄라고 불린다. 모든 죄악은 하나님과 그 분의 뜻에 대한 반역의 깃발 아래 놓이게 된다.

에덴에서의 반역의 결과로 많은 일들이 생겨났다. 우선,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다. 이 분리는 영적 죽음이라 불리며, 이것만으로는 인간은 죄많은 육체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채로 영원히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나 스탈린과 영원히 산다고 생각해 보라! 교정할 수 없는 악한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을 상상해 보라. 하지만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났다. 로마서 5장 12절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죄가 왔고 죄의 결과로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영적 죽음 뿐만은 아니었다. 이를 확인하려면 바울이 처음 아담의 육체적 죽음과 나중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 고린도전서 15:20절을 읽어보면 된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심으로 그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하신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 3장을 읽어보라. 영적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적 죽음도 죄에서 기인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보내셨는가? 죽음의 세 가지 국면을 주의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1.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간과하실 수 없으시다. 그분의 본질과 아담에게 주신 경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셔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 세상에 놓여진 죽음의 저주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다.

2. 인간 반역의 양상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분리다.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과 세상을 떠난 사람 사이의 분리의 슬픔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의 엄청난 슬픔을 생각해 본다면 아담을 하나님과의 완벽한 관계에서 분리시켜놓은 죄의 무서운 결과가 상기될 것이다. 아담이 모두를 대표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분리는 모든 인류를 포함한다.

3. 많은 사람이 놓치는 죽음의 또 다른 국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음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그분께서 내려주신 저주를 인해 실제로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한다. 하나님과 분리된 채로, 영원히 죄악된 상태로 사는 것을 상상해 보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주 놀라운 일을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적 죽음의 저주를 내려주심으로써 인간을 다시 하나님께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음의 저주를 견뎌내셨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 : 9) 스스로 우리의 반역죄를 위한 완벽한 희생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셨다. 그분은 공정한 재판관의 손에서 마땅히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할 형벌을 떠맡으셨으며,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그 형벌을 참아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요, 구세주로 믿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돌려 받은 바 되었다. 놀라운 메시지가 아닌가?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메시지다. 인간은 죄로 인해 특별한 위치를 상실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저주를 내려주심으로써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로 회복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얼마나 기이한 일을 행하셨는가! 성만찬식을 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죄의 두려움을 기억한다. 매 주일 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따라서 죄와 사망의 정복을 기뻐한다.

하지만 진화론은 이런 사랑의 메시지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진화론적 과정은 죽음과 투쟁, 잔인함과 야만성, 냉혹함의 과정일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은 생존을 위한, 약자와 불구자의 제거를 위한 무시무시한 싸움이다. 진화론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이런 것이다 - 인간을 존재하도록 한 죽음, 피흘림과 투쟁, 그리고 수백 만년간의 죽음. 이는 인간에 이르게 되는 전진과 수직적인 “진보”이다. 그러나, 성경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인간의 행동이 죄를 낳았고, 죄가 사망을 낳았다. 성경은 피흘림 없이 죄의 용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히 9:22).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죽음과 피흘림을 제정하셨다. 만약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죽음과 피흘림이 존재했다면, 속죄의 기반은 무너진다.(이 문제에 관한 자세한 변론을 위해서는 이 책 마지막의 참고 서적에 나열된 “인간 : 원숭이?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Man: Ape or Image)을 보라.)

진화론자들은 죽음과 투쟁이 인간을 존재하게 했다고 말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반역적 행동이 죽음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 진술 모두가 참될 리는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부정한다 - 이들은 정면으로 대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쪽의 입장을 동시에 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타협론자들(유신론적 진화론자)은 복음의 기반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앞을 향한 “진보”라면 어떻게 아담이 위를 향해 타락할 수 있는가? 죄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죄는 불순종으로 인한 인간의 타락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동물적 특징이 될 것이다. 진화론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그 위에 더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믿노라고 공언하는 복음 기별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사람이 내게 와서 그리스도인도 진화론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배 시간에 타락 전에는 죽음이 없었다는 사실을 성경이 가르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죽음이 있었다고 믿는냐고 물었다. 성난 목소리로 그는 내게 물었다. “아내를 때리십니까?” 이 질문에 나는 흠짓 물러서게 되었고, 그가 말하려는 요지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는 다시 내게 물었다. “아내를 때리십니까?” 그리고 그는 걸어가 버렸다. 설교하는 여정에서 삶은 재미있는 경험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나는 꽤 오랫동안 그 남자의 말에 관해 생각했고 한 심리학자와 이야기 한 뒤에, 예나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과 상관없이 덫에 걸리게 되는 종류의 질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 남자가 던져야 했던 질문은 “이제 아내를 안 때리십니까?”였다. 예라고 하든지, 아니라고 하든지 당신은 아내를 때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죽음의 문제와 아담의 타락과 관련해서 그가 긍정으로 대답했다면 “예, 아담의 타락 전에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과 상반되는 어떤 믿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었다.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진화론을 부정하게 되며, 어느 쪽으로도 진화론을 성경에 더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그는 미궁에 빠졌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서 당신이 진화론을 믿는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님을 단호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로(진화론이 가르치는 바를 몰라서, 자존심 때문에, 혹은 성경에 대한 자유분방한 견해로) 진화론을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진화론을 믿는 그런 사람들은 모순되며, 실제로 복음 기별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고수하고 있는 입장에 상반되는 증거를 심각하게 고려해보라고 항변하고 싶다.

미국 무신론자지 1978년 9월호 19페이지에 실린 “진화론의 의미”라는 제목의 G.리차드 보잘스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무신론자들도 그리스도인들이 진화론을 믿는 것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는 창세기에 묘사된 특별 창조에 완전히 헌신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 기독교는 모든 힘을 다해서 옳든 그르든 진화론에 대항해 싸워야만 한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관한 모든 정당성이 아담의 존재와 아담과 하와가 먹은 금단의 과일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이 이제 분명해졌다. 원죄가 없다면, 구원받을 필요가 있겠는가? 죽음으로 끝맺어지는, 죄의 연속인 삶속으로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분자생물학과 철학에 관한 공헌으로 주목받은 무신론자 재퀴어스 모노드는 그에 대한 찬사로 1976년 6월 10일에 호주 방송 위원회에 의해 방영된 “생명의 신비”라 이름 붙여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택(도태)은 새로운 종, 더 복잡하고 개량된 종을 진화시키는 가장 맹목적이고 잔인한 방법입니다...그 과정은 제거와 파괴의 과정이기 때문에 더욱 잔인합니다. 살기 위한 투쟁과 약자의 제거는 우리 현대 사회의 윤리 전체가 반대하는 무서운 과정입니다. 이상적인 사회는 비선택적 사회이며,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이는 소위 자연 법칙과는 정확히 반대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진화를 위해 이 과정을 어떻게든 세우셨다는 아이디어를 옹호하려 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습니다(저자의 강조).

원죄와 그 결과로 온 죽음은 복음의 기반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와 복음의 전부다. 첫 아담이 단지 우화적 인물이라면 마지막 아담 - 예수 그리스도 - 이 그렇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고전 15:45-47) 인간이 죄악 속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필요하지 않다. 진화론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기독교의 기반을 파괴한다. “죽음은 지금도 삶의 일부이며 항상 삶의 일부가 되어왔다.” 이제, 당신이 고층 빌딩에 살고 그 빌딩 밑에 있는 사람들이 착암기를 가지고 기반을 두들기고 있다면 “그런데?”라고 말하겠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하고 있다. 이들은 미디어와 공립 학교 시스템, 텔레비젼, 신문에 의해 진화론으로 폭격받고 있지만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고층빌딩”의 기반이 진화론이라는 “착암기”에 의해 좀먹고 있다. 하지만 고층빌딩 안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거나 착암기를 던져주면서 말한다. “착암기가 여기 몇 개 더 있어요! 우리 기반을 무너뜨려주세요!”

더 심한 일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진화론과 하나님 둘 다를 믿는 사람들)이 복음의 기반을 전복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편 기자가 시편 11장 3절에서 말했듯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복음의 기반이 무너지면 그 기반 위에 세워진 구조물(기독교 교회)은 대규모로 붕괴될 것이다. 기독교란 구조물을 보전하고 싶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기반을 보호해야만 하며 따라서 진화론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어야만 한다.

새 하늘과 새 땅

회복된 낙원

진화론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가르침도 파괴하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이야기인가? 사도행전 3장 21절은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만물이 적어도 원래의 상태로 돌이켜 진다는 뜻이다. 그것이 어떠할 지는 다음과 같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사 11:9) 채식을 할 것이고 폭력은 없을 것이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 .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사 11:6-7) - 채식주의! “다시 저주가 없으며”(계 22:3).

창세기에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이 식물만을 먹도록 분부받는 사실을 발견한다(창 1:29,30); 그들은 채식을 했었다. 홍수 후에야, 인간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창 9:3).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단지 채식만을 했으며, 아담의 범죄 전에 폭력이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자가 고기를 먹도록 만들어진 날가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처음 피조물들이 채식을 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정말 그런가? 아니면 그것이 단지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인가?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사자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찢는 일에 좋다는 사실이다. 지금 다른 동물을 찢는 일에 유용한 이빨이 마찬가지로 식물을 찢는 일에도 유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자는 타락 전에 채식을 했었고 미래의 낙원에서 다시 채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육식”동물들도 여전히 채식을 할 수 있다. 개와 고양이들은 균형잡힌 채식을 먹고 잘 살아남는다. 또한 성경은 타락할 때(그리고 미래의 회복 때)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셔서 식사 습관과 관련해서 피조물들에게 직접적인 생물학적 영향을 미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늘날 살고 있는 많은 동물들이 육식성으로 보이는 이빨을 가지고 있지만(예를 들어 날아 다니는 여우라고 불리는 과일 박쥐), 그들은 이빨을 과일이나 식물을 먹는 일에만 사용한다(부록 1 참조).

진화론은 아담 이전에 투쟁과 잔인함, 야만성, 그리고 동물이 동물을 먹으며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기 때문에 이를 믿는 일은 아담 이전에 전세계가 낙원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 회복될 것인가? 진화론을 믿는다면 아담 전에 수백 만년 동안 죽음과 투쟁이 있었다고 믿기 때문에 당신은 아담 이전의 낙원을 부정해야만 하고 종말에도 낙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야만 한다(세계가 이전처럼 회복될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에). 따라서, 진화론은 심장부와 기반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희망까지 공격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밖에서 뭔가 해야만 한다. 우리 중 상당수가 진화론은 과학과 관계가 있으며 이와 싸우기 위해서는 과학자가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속고 있다. 하지만 진화론은 단지 신앙이며 이와 싸우기 위해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또한 진화론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진화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화론자들이 우리가 주위에서 보고 있는 죽음과 투쟁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 돌연변이들(유전자에 있는 착오)을 이용해서 진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을 가지고 과거를 추정하며 수백 만년에 걸친 이러한 과정이 진화의 기반이 된다고 연역해낸다. 따라서 진화론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오늘날 진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데 동의해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창조의 역사를 끝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창 1:31-2:3). 이는 진화론자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과 정반대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하나님께서 한 때 진화를 사용하셨으며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진화가 오늘날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과거라면 일어났을 거라고 말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화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과학의 참된 본질 - 진화론이 종교라는 - 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진보적 창조와 같은 믿음을 버렸다. 그러나 많은 목사와 신학자 등등이 성경에 대한 자신들의 전적인 견해 때문에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성경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와 기본적인 철학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이 논쟁을 요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한 개신교 목사와 맞닥뜨려졌던 실례를 드는 것일 듯 싶다.

호주 브리스베인에 있는 창조 과학 재단의 직원들이 다양한 장소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빅토리아 주까지 1700km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한 장소에서 이 목사는 우리를 대놓고 반대했다. 같은 교회의 다른 목사가 교회주보에 우리의 방문에 관한 광고를 실었다. 이 반대하는 목사는 주보가 인쇄되기 전에 원판을 입수해서 그 광고를 지웠다. 그는 우리 세미나를 배척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겼으며, 우리 기관과 가르침을 훼방하는 많은 진술들을 공공연히 행했다. 그는 심지어 우리가 사단에게 속해있으며 우리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그 목사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창세기가 단지 상징적이라고 믿으며 성경에는 아주 많은 실수들이 있고 나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창조와 진화에 관해 그런 의견의 차이를 가졌던 것은 성경에 대한 개인적 접근 방식에 관한 기본적인 철학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에 동의했지만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취할 수는 없으며 창세기는 단지 상징적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냐고 물었다.

그가 말했다. “예, 그것이 창세기가 가르치고 있는 기별입니다.”

일부러 나는 창세기 1장 1절을 인용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가 말했다. “예, 물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기별입니다.”

나는 그가 창세기 1장 1절을 바로 문자적으로 취했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창세기 1장 1절이 상징적이냐고 물었고 그렇지 않다면 왜 문자적으로 취했냐고 물었다. 그리고나서 나는 창세기 1장 2절이 문자적인지 상징적인지 물었다. 나는 창세기 1장 1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창세기 전체가 상징적이라고 말하는 모순을 지적했다. 그는 계속해서 창세기가 무엇을 말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물었다. “창세기가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면 무언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말하는 바를 취할 수 없다면 영어(또는 어떤 다른 언어도)는 실제로 말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성경에 관해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결정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동료들의 의견 일치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러면 그것이 목사님이 진리를 결정하는 기반이 되는군요. 어디에서 그런 기반을 얻으셨으며 그것이 진리를 결정하는 올바른 기반인지 어떻게 아십니까?”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학자들의 의견 일치를 통해서입니다.”

나는 다시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이제 그것이 목사님 동료들이 진리에 대해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는가를 결정하는 기반이라면, 그것이 진리를 결정하는 올바른 기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그는 내게 이 주제에 관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없으며, 토론을 이제 끝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하고 있던 일은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말씀하시도록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의미와 말하는 바를 결정하기 위해 인간의 지혜에 호소한 것이었다. 우리 입장의 실제적 차이는 다음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어디에 믿음을 두는가 - 전지하지도 않고 그곳에 있지도 않았던 오류에 빠지기 쉬운 피조물인 인간의 말에, 아니면 전지하시며 그곳에 계셨고 완벽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성경에 대한 이런 자유분방한 견해를 취하는 그리스도인들 (또는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음 세대 - 그들의 자녀-에게서 이런 그릇된 철학의 작용을 보지 못한다. 자녀들에게 확고한 기반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다음 세대에서 기독교의 전체 구조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상당수에 있어서 그들 자녀의 대부분이 기독교를 완전히 거절한다는 사실은 슬프지만 사실이다. 자유분방한 신학에 관련된 이 딜레마는 창세기에 관한 투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 창세기를 거부하거나, 창세기가 단지 상징이나 전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논리적으로 성경의 나머지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여러분은 이 사실이 홍해를 건너는 일, 불타는 수풀, 사람을 삼킨 물고기(몇 개만 대더라도)와 같은 기적을 설명을 통해 없애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반영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기적을 설명을 통해 제해버리려 한다. 때때로(점점 증가하고 있지만) 동정녀의 출산과 부활마저 부정된다. 일단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창세기가 나머지 성경에 대한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성경이 말하는 나머지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일은 쉬운 과정이다. 나는 분명하게 상징적이지 않는 한, 성경을 문자적으로 취한다. 상징적인 곳이라 할 지라도 사용된 말과 구절은 문자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문이라고 말하는 예를 들어 성경을 문자적으로 취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의 관습을 이해하면 우리는 목자들이 문 옆에 앉아서, 문자그대로 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문자그대로 문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자그대로 문이 되신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진술과 문맥, 관습을 주의깊게 고려하지 않고 성경의 자구에 관한 결론으로 신속하게 뛰어든다. 성경이 상징적 또는 은유적으로 취하도록 의도되어 있을 때는, 문맥으로부터 그 사실이 분명하던지, 아니면 그렇게 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물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창조과학 사업이 분열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분명히 옳다; 진리는 항상 나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듯이, 그 분은 쪼개는 검을 가지고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과 그렇지 않게 사는 것 사이의 긴장 때문에 관계가 깨어진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아오는가? 평화와 조화를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자주 타협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평화가 아닌 투쟁을 예견하고 계셨다. 누가복음 12장 5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실제적인 시각에서 나는 성경이 실수로 가득 차 있다거나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대답이 있으며 그들이 실제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듣고 싶어한다.

어느 모임에서 한 어머니가 자신의 딸이 지역 공립 학교에서 내가 강의했던 교실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딸은 그녀에게 학생들에게 무엇보다 인상을 남겨 주었던 것은 내가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갖지 않고 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인상을 받았다. 이 일은 한 성경말씀을 내게 상기시켜 주었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방법에 있어서 매우 권위적이고 독단적이셨다. 그 분께서는 천국으로 가는 다양한 길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 분은 오셔서 자신이 영생으로 가는 여러 길 중 하나라고 믿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예수님께서 가르치신다면 나는 그 분께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대단한 분열을 일으키실 것이다! 2,000년 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듭난 그리스도인, 오늘날 지구에서 그리스도를 구현하고 있는 우리가 분열을 일으킬까봐 진리를 선포하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어느 특정 교회의 청년 모임에서 창세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순서의 마지막에서 청년들에게 자신이 성경에 대한 나의 “낮은”견해에 대해 대단히 실망했노라고 말했던 청년 지도자에게 크게 놀랬다. 그는 내가 완벽한 성경을 하나님께 강요하려 했으며 성경에 대한 이런 견해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성경에 실수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 대해 대단히 “고등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 대화 후에 나는 이 사람을 위해서는 말씀이 의미가 없다고 결정지었다.

많은 사람(특히 어린 세대)들이 권위적 가르침의 결핍에 대해 평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교회에 대한 슬픈 고발이다. 이 백성들을 어떻게 먹이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