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도 들지 않는 오래된 아파트의 2층,
숫자를 셀 수 없는 수 많은 바퀴벌레가 날아다녀서 주방 문을 열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모든 음식을 외부에서 해결해야 했던 집,
아이를 한명만 낳는 중국에서 우리집 3명의 아이와 길을 걸어가며 받았던 ‘거리감’의 시선,
어학연수를 받는 학교에서, 서류 일을 하기 위해서 들렀던 관공서, 공안국, 이민국 등에서 받았던 경계의 시선과 의심의 질문,
“어떻게 일도 안 하면서 온 가족이 이렇게 중국에 와 있을 수 있습니까?”
중국 도착 한달 후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 집에서 시작한 성경 공부 시간에는 남의 시선, 감시가 무서워 모든 커튼을 다 닫고 제일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려고 노력했던 두려움의 시간들,
집에서 찬양을 크게하는 청년들에 놀란 내 모습에 실망하며 ‘내가 뭐하러 중국에 왔나’라고 자괴감이 들었던 그날 밤,
‘잡혀가면 교도소 전도하면 되지!’ 라는 아내의 말에 더 초라해진 ‘목사로서의 자존심’,
그렇게 작아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매주 예배에서 더 큰 목소리로 찬양하기 위해 급하게 구입한 전자 피아노,
그럼에도 교회가 없는 곳에서 은혜로 가정 모임부터 시작하여 두개의 중국인 집회소 및 한개의 외국인 모임을 시작할 수 있게하셨던 기적의 시간,
첫번째 집회소에 날 찾으러 온 공안과 담판 지으며 보호하려 고생하셨던 지역교회 목사님들,
두번째 집회소의 첫 안식일, 기쁨 가득 안고 교회로 운전하는 길에 공안이 잡으러 왔으니 당분간 집회소에 오지 말라는 전화에 몇 달 동안 두번째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시간, 그럼에도 그 후에 매주 20여명의 사람들을 보내주어 성경 연구를 할 수 있게 하신 은혜의 시간,
입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서툴지만 중국어로 성경을 가르치고 토론하게 하신 기적의 시간,
아이들 학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아이들을 힘들게 했고 문제를 해결 해 줄 수 없는 내 능력에 작아지고 많이 울었던 시간,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곳,
그러면서도 4년을 살며 만났던 수 많은 좋은 사람들, 도움의 손길들, 기적들,
비자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던 공부를 국제관계학 박사까지 기적적으로 모두 마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 곳을 떠난지 7년이 흘렀음에도 중국어로 대화하는 둘째, 셋째를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아빠의 뿌듯함 등
2013년 2월부터 2017년 2월까지 4년 반의 중국 생활은 쉽지 않으면서도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시간이었다.
4년을 중국에서 살면서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로, 남편으로, 목사로 버틸 수가 없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매일 하나님께 투정하며 밤새 울던 날이 이어지던 2016년 12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 6시 한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송 목사님, 잘 지내십니까?”
제가 몸 담고 있고 있는 SDA 삼육외국어학원의 사장님이셨던 최길호 목사님 전화 였다.
“네, 목사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었고,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이니 목사님께서 바쁜 중에 연말 안부 전화를 주신줄 알다.
“송 목사님, 혹시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어요?”
조금 이어진 대화중에 갑자기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이야기를 하신다.
2016년 8월에 잘 풀리지 않는 막내의 초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 원망도하고, 주변인의 도움도 받고, 그렇게 힘들게 진학 문제를 해결한지 이제 겨우 5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동’을 말씀하시는 거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공식적으로 ‘나는 SDA삼육외국어학원에서 지회로 파견 신분이며, 지회의 일로 인해 중국에 있는 것인데 왜 사장님이 나의 이동에 대해서 말씀하실까’ 라는 의문도 들어
“목사님, 이동이라 하심은 어디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라고 조심스럽게 여쭤보니
“아~네, 혹시 내년에 필리핀 연수원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나해서 연락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