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이름


맨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콩고 선교사 베나가 우리 시은이에게 "카힌도"라는 콩고식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카힌도"의 엄마라고 "마마 카힌도"라고 불렀다. 시은이는 자기를 카힌도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곳 사람들은 어딜 가나 카힌도라고 불렀다. 그들식의 이름을 쉽게 기억하고, 부르기가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곳 대회장님께서도 언제나 우리 가족들 소개할 때 시은이는 "카힌도", 나는 "마마 카힌도"로 소개를 한다. "김윤주" 라는 한글 이름을 발음하기가 그들에겐 무척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억하기가 힘들어서 매번 물어봐야 하는데, "마마카힌도"는 한번만 들어도 바로 기억에 새겨지는 것 같다. 실제로 예배가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오면 우리를 빙 둘러선 아이들이 "마마카힌도"를 외친다. 그래서 한 번 밖에 안 본 아이들도 나를 단번에 알아보고 이름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마마"는 여자 어른, 또는 엄마라는 뜻인데, 이들은 언제나 나를 "마마"라고 부른다.

옛날 우리 나라의 왕비 또는 지체가 높은 집안의 여주인을 "마마"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이름이 듣기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

한편 사모님이라는 뜻의 불어식 표현으로 "마담"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이름은 왠지 다방 여주인이 생각나서 썩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이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호칭이다.


카힌도 이야기를 더 하려고 한다.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법을 스와힐리어로 배우고 나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을 물어봤다. 그런데, 왠만한 여자들은 다 "카힌도"라고 한다. 거리에서 카힌도를 부르면 여자아이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다 돌아볼 정도로 "카힌도"가 많다.


그래서 스와힐리어 선생님한테 이름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이들의 이름을 짓는 방식은 흥미로우면서 간단했다.

이들은 형제중 몇 번째로 태어났는지에 따라서 이름이 결정된다. 그러니까 한국처럼 부모들이 고민고민해서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서에 의해서 이미 정해진 이름이 주어진다.


만약 아들만 계속해서 6명이 나오면 차례대로 첫째는 팔루쿠 또는 뭄베레, 둘째는 캄발레 또는 캄바수, 셋째는 카세레카, 넷째는 카쿨레, 다섯째는 카템보, 여섯째는 음부사 또는 카부사 이다.

또, 딸만 계속해서 6명이 나온다면, 첫째는 마시카 또는 카네레, 둘째는 카비라, 셋째는 카부고, 넷째는 카함부, 다섯째는 카퉁구, 여섯째는 캬키뫄 이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을 들으면 그 집에 아이가 몇 명인지는 몰라도 그가 몇째 아들인지, 혹은 몇째 딸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계속 아들만 나오다가 첫 번째 딸이 나오면 그는 "카힌도"이다. 그래서 우리 시은이가 "카힌도"인 것이다. 또한 딸만 계속 나오다가 아들이 나오면 그는 "무힌도"이다. 다시 말하면 카힌도와 무힌도는 성(性)이 바뀌는 첫 번째 아이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그 뒤로는 자기 순서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자기가 태어난 순서에 따라 부여받은 이름에 패밀리 네임, 그러니까 성을 붙이게 되는데,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성을 쓴다고 한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증조할아버지든 고조할아버지든 모두가 성이 같은 한국인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들은 성이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가 같고 아버지와는 틀린 성을 쓴다. 그럼 어떻게 가족인 것을 구분하느냐고 물었는데, 그들만의 구분법이 있다. 이들의 성에는 사는 지역이 들어 있어서, 쉽게 가족인 것을 구분할 수가 있다고 한다.


장녀나 장자가 태어날 때 그 부모의 양가 어른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모두 다 살아계신다면 그 아이의 이름은 "잔주(Nzanzu)"가 된다. 4분의 어른중 한분이라도 돌아가셨다면 첫 아이의 이름에 "잔주"를 쓸 수 없다.

만약 아들이나 딸이 6명 이상이 되면 일곱 번째 아들이나 딸의 이름은 "지아바케(Nziabake)" 인데, 이는 "아주 적다"라는 뜻으로 별로 환영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태아가 죽거나 출생 후에 죽는 아이들이 많은 이 곳에서는, 처음 몇 명의 자녀가 죽은 다음 생존하는 첫 번째 아이를 "마신다" 라고 부르는데, 이는 "이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버려질 것이다"라는 뜻의 "캬부"라고도 부른다.


이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고, 예수님의 피로 사신 바 된, 존중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들인데, 이름들을 듣고 있는 동안 그들 스스로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언젠가 이들도 예수님이 주시는 새이름을 부여받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소망을 전해줘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