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이 가정을 바꾼다] [2] 교사 출신 김은혜씨의 새 삶

왼쪽 눈 혈관종 앓는 5세 소녀, 아버지가 빚내가며 수술해줘… 유언이 "우간다의 손 놓지말라"
나눔의 씨앗 살리려 우간다行… 아버지가 세운 학교 키워 나가

                

초등학교 교사였던 김은혜(34)씨는 2009년 8월 5일 아프리카 우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편(35)·딸(11)·아들(6)과 함께였다. 이후 지금껏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우간다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다. 11일 통화에서 "왜 우간다에 갔느냐"고 묻자 아버지 김종성(2009년 작고·당시 55세)씨 얘기를 했다. "가장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곳을 찾아가셨던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됐을 때 이곳에 왔다"며 "절망의 땅을 일군 아버지의 삶을 뒤늦게 존경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김종성씨는 2006년 4월 우간다 굴루 지역 난민촌에 정착했다. 목사 출신인 그는 2005년 11월 아프리카에 있는 친구를 방문했다가 "내전(內戰)으로 가장 비참한 곳은 우간다의 굴루"라는 말을 들었다. 그곳에서 더러운 물과 말라 비틀어진 나무뿌리를 먹는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잿더미만 남은 곳에 우물을 파고, 학교와 보건소를 짓고, 질병으로 신음하는 아이들과 살을 비비며 알파벳과 숫자를 가르쳤다.


2007년 1월 우간다 굴루 지역에서 김종성씨가 현지 아이들 속에서 미소 짓고 있다(사진 위). 이로부터 6년 6개월이 지난 올해 7월 같은 장소에서 김씨의 딸 은혜씨가 부모가 없거나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사진 아래). 평생 둘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을 정도로 부녀(父女)가 다정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은혜씨는“아버지가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려 했던 마음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됐다”며 울먹였다. /김은혜씨 제공         

2007년 김종성씨는 왼쪽 눈이 성인 주먹 크기만큼 부풀어오른 소녀 플로렌스(당시 5세로 추정)를 발견했다. 혈관종 때문에 눈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홀어머니에겐 진통제 한 알 살 돈도 없었다. 김씨는 그해 3월 빚을 내 플로렌스를 한국으로 데려와 수술시켰다. 김씨의 딸 은혜씨는 이때 서울에서 플로렌스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그때까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아버지가 '좋은 일을 하시는구나'란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고 했다. 치료가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서둘러 우간다에 돌아갔다.

2009년 3월 8일 은혜씨에게 "아버지가 소천했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제대로 된 병원이 없어 사인(死因)조차 못 밝힌 채 그는 떠났다. 몸이 약했던 그가 평소 유언인 양 하던 말은 "우간다의 손을 놓지 말라"였다. 은혜씨는 "많은 고민을 했지만 제가 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나눔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아 괴로웠다"며 "'한국에서가 아니라 우간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서울 고대구로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인 플로렌스 사진         
지난달 23일 서울 고대구로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인 플로렌스. /밀알복지재단 제공         

우간다로 간 은혜씨는 플로렌스를 만나고 깜짝 놀랐다. 종양이 다시 커져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플로렌스를 당장 고쳐주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차에 후원 단체인 밀알복지재단의 도움을 받게 됐고, 지난달 23일 한국에서 플로렌스를 수술해줄 수 있었다. 체구가 조그만 플로렌스는 "킴(김종성씨)과 그레이스(은혜씨)를 만나 한국에 두 번이나 온 나는 행운아"라며 "아포요(우간다어로 '감사합니다'란 뜻) 꼬레아"라 했다. 은혜씨는 "플로렌스가 우리 부녀(父女)를 만난 것은 행운이지만, 내게 플로렌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 계기이자 나눔의 대(代)를 잇게 해준 아이"라며 고마워했다.

평생 둘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을 정도로, 부녀는 다정한 사이는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점심을 때우려고 100원을 갖고 초코파이를 먹을까, 달걀을 먹을까 고민할 정도로 가난했어요. 장학금이 없으면 학교도 못 다녔겠죠. 아버지가 남을 돕느라 가족을 잘 돌보지 않았거든요." 아버지가 우간다에서 지낼 때, 은혜씨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가족에게 소홀하고 빚까지 져가면서 남을 돕는 아버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딸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고,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며 살려 했던 마음을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됐다"며 울먹였다.

그녀는 우간다 사람들이 아버지 장례를 치러주며 진심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뿌린 나눔의 씨앗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후원을 시작한 한국인도 80명 정도 된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요. 여기 불쌍한 애가 많다고 말씀하실 때 소홀히 듣던 게 후회돼서…. 계실 때 '존경한다 사랑한다' 한마디 해 드릴걸…."

은혜씨는 우간다에서 평생 살 생각이라 했다. "한국이 그립죠. 하지만 자랑스러운 아버지처럼, 여기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아버지가 1·2학년 학생만 가르쳤던 학교 '킴스스쿨'을 은혜씨는 7학년까지 늘렸다. 현재 킴스스쿨에는 학생 430명이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