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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일요일 - 용서의 한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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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다.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나에게 빌린 돈을 어서 갚아라!’ 동료는 그 종의 무릎 아래 엎드려 빌었다. ‘기다려 주게. 내가 모든 것을 갚겠네.’ 그러나 그 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가서 동료를 감옥에 넣고, 자기에게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마 18:28~30, 쉬운성경).

위 비유의 두 번째 대목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로 장면이 바뀝니다. 베드로와 똑같은 우리가 곤란에 빠지는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역학 관계를 파악해 봅시다. 무릎 꿇고 기도하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일어났을 때 그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유쾌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10분 뒤, 몇 주일 동안 자기를 피해 다닌 얌체 같은 동료와 맞닥뜨립니다. 마침 잘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빚을 지고 숨어 지낸 것입니다.
동료가 갚아야 할 액수는 적지 않습니다. 100데나리온이면 100일치 노임입니다. 1년 봉급의 3분의 1에 맞먹는 것입니다. 시급 8,000원으로 계산하여 하루 8시간씩 100일이면 640만 원입니다. 이 정도면 저 같은 사람에게는 1년 지출 비용 중 상당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엄연히 그의 돈이고 지금 그 돈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동료의 멱살을 붙잡고 돈을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동료는 무릎을 꿇고 사정합니다. 조금만 참아 주면 빚을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교활한 녀석에게 이미 충분한 시간을 주었습니다. 이제 정의를 행사하여 일을 바로잡아야 할 때입니다. 이 야비한 친구에게 너무 오랫동안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제는 응분의 처분을 내리려고 합니다.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의 비유 두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인간의 관점을 목격합니다. 친구는 용서의 할당량을 다 써 버렸습니다. 그가 용서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제 의로운 분노를 발휘하여 관계를 끊어도 괜찮을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법대로 처리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구하는 동료의 애원은 최근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탄원과 거의 흡사합니다. 따지고 보면 동료가 그에게 갚아야 할 돈도 전부 그가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할 빚에 불과합니다. 그 사실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서 어쩌란 말인가요? 분명 지금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친구인데요. 잘못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요? 혹시 여러분의 생각도 거기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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