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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금요일 - 고난 중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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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마 26:39~44).

인성의 나약함이 하나님의 뜻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예수님에게는 일생일대의 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일을 힘들이지 않고 쉽게 승리한 슈퍼맨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와 같이 고난을 겪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목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의 사명이 크고 높았던 것만큼이나 그분의 싸움은 우리의 싸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격렬했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유혹과 도전에도 겁을 먹어 거센 압력을 받기도 전에 굴복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뒤로 물러섰다면 성육신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뻔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영원한 희생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그 길을 포기하여 전 인류가 멸망의 열매를 스스로 거두게 하든지 예수님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마귀는 이 싸움에 걸린 심각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마귀는 이 세상에서 제멋대로 활보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사명을 성취하시면 그것으로 자신의 운명이 판가름 난다는 것을 사탄은 잘 알았습니다. 몇 시간 뒤에 나타날 사건에 세상의 운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같은 긴장 속에서 겟세마네로 들어가셨습니다. 일생의 중대한 선택을 앞에 두고 전에 없이 몸부림치시는 모습이 세 번이나 반복된 기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수치스럽게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십자가 위에서 그분이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시고(고후 5:21), 우리가 받을 저주를 자기 위에 뒤집어쓰시는 것입니다(갈 3:13).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을 <시대의 소망>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서 분리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심연은 매우 넓고 매우 검고 매우 깊었으므로 그분의 심령은 그 앞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민을 피하기 위하여 그분은 그의 신성의 능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했다. 인간으로서 그분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어야 했다”(686).
 예수님은 자기를 짓누르는 압력을 느끼면서 고뇌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의 원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로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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