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원동지회장 엘드리지 목사 별세
(원동지회: Far Eastern Division - 북아시아태평양지회의 전신)

BY DON ROTH  

여러해 동안 선교사와 교회 행정자요 또한 전쟁포로였던 94세의 폴 허버트 엘드리지 목사가 94세를 일기로 오랜 투병 끝에 로마린다에서 잠들었다.
 
ELDRIDGE-1.jpg 
 
엘드리지 목사는 40년 동안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목사와 교사와 행정자로 봉사했으며, 전 원동지회장을 역임했다.
            
필리핀에서는 공습과 총격과 기아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험을 했다. 그의 악몽같은 시간은 진주만이 습격을 당한 다음 날이 1941년 12월 8일에 시작되었다. 이날부터 일본군은 필리핀에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으며 몇 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엘드리지 목사 가족은 마닐라 북쪽에 위치한 휴양도시인 바기오(Baguio)로 가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국제적인 문제가 안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긴장 관계가 지속되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일본에 있는 선교사 가족들을 필리핀으로 철수시켰다. 필리핀이 보다 안전한 곳으로 판단하고 기회가 되면 미국으로 철수시킬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일본군은 진주만을 폭격하고 마닐라와 싱가폴과 홍콩과 극동 지방의 도시들을 공격했다. 한 때 엘드리지 목사는 마닐라에 있었고 가족들은 보다 안전한 장소인 바기오에 있었다. 결국 가족들이 다시 만나 전에 우리 대학이 있었던 산토 토마스(
Santo Tomas)로 갔으며 여러 나라와 여러 교단에서 온 500명의 선교사들이 감금되었다.
처음에 전쟁포로 수용소에 들어갈 때는 기껏해야 며칠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들었지만 이 며칠 동안이 3년 동안의 감금의 시작에 불과했다. 전쟁포로들은 가능한 한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여건은 만만치 않았다.

구원은 미군이 일본군 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한 1945년 2월 23일에 찾아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일본군 진영에 착륙하여 한 시간 동안 전투를 벌이는 사이 선교사들은 일본군 저격수을 피하여 안전하게 트럭에 올라탔다. 미군 당국이 선교사 가족들과 비종교단체의 사람들을 미국으로 배로 후송하기 몇 주일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교회지도자들은 엘드리지 목사에게 일본으로 귀환하여 교회를 재건하는 일을 돕도록 요구했다. 엘드리지 목사와 레타 사모(Retha)는 선교사로서 20년간을 일본에서 보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의 언어능력은 탁월하여 대부분의 일본인 청취자들이 이 방송의 진행자가 일본인일 것으로 생각했다.

1966년, 엘드리지 목사는 싱가폴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원동지회(Far Eastern Division)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원동지회는 이후에 아시아태평양지회로 개명한 뒤에 북아시아태평양지회와 남아시아태평양지회로 나뉘어졌다.
 
1975년에 은퇴한 엘드리지 목사는 일선목회와 원목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90년 57년 동안 함께 살아온 사모의 별세 후에 엘드리지 목사는 에블린 데이비스(Evelyn Davies)와 재혼한 후 로마린다 지역으로 이사했다.
 
엘드리지 목사의 추모예배는 3월 21일 레드랜즈에 있는 코트너 장례식장((Cortner Funeral Home in Redlands)에서 드릴 예정이다. 
 
유가족으로는 사모인 에블린과 아들 래리, 스테파노스 더글라스, 데이빗과 로져, 의붓딸 도로시, 19명의 손자들, 12명의 증손자들, 두 명의 고손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