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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는 내 부족함으로.
아마 전자이겠죠.
끝까지 기다리시면 분명 좋은 역사와 축복의 경험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힘 내세요. 다 하나님 책임 아니겠어요?
--------
아침에 이어서 씁니다.
--------
비록 일본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준비했지만,
사정이 바뀌어 다른 곳을 가야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뜻하신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래에 올린 아프리카의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톤처럼요.
그는 원래 중국 선교사로 갈 준비를 했었답니다. 중국어도 배웠고, 의학공부도 했었지요.
아편전쟁으로 길이 막히자 선교회는 리빙스톤을 아프리카로 보내지요.
훨씬 환경도 열악하고 그가 배운 중국어는 전혀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는 곳으로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남의 얘기 같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잘 섬기는 자를 축복하신다고 어느 목사님께서 극동방송을 통해 지금 말씀하시네요.
부담이 많이, 정말 많이 되시겠지만, 어쩌면 마음을 이미 정리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 확신합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는 저도 만만찮은 상황임을 아실 겁니다.
저도 수년 내에 곧 PMM선교사의 길을 가야 하는데, 참으로 염치가 없는 줄 압니다만,
하나님께서 천 목사님 가정을 많이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저도 왜 이런 글을 올리는지 잘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 힘~내세요.!!!. 도전해 보시길...
안 될 때가 있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또는 내 부족함으로.
아마 전자이겠죠.
끝까지 기다리시면 분명 좋은 역사와 축복의 경험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힘 내세요. 다 하나님 책임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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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이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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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일본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준비했지만,
사정이 바뀌어 다른 곳을 가야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뜻하신 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래에 올린 아프리카의 위대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톤처럼요.
그는 원래 중국 선교사로 갈 준비를 했었답니다. 중국어도 배웠고, 의학공부도 했었지요.
아편전쟁으로 길이 막히자 선교회는 리빙스톤을 아프리카로 보내지요.
훨씬 환경도 열악하고 그가 배운 중국어는 전혀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는 곳으로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남의 얘기 같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잘 섬기는 자를 축복하신다고 어느 목사님께서 극동방송을 통해 지금 말씀하시네요.
부담이 많이, 정말 많이 되시겠지만, 어쩌면 마음을 이미 정리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 확신합니다.
이렇게 글을 올리는 저도 만만찮은 상황임을 아실 겁니다.
저도 수년 내에 곧 PMM선교사의 길을 가야 하는데, 참으로 염치가 없는 줄 압니다만,
하나님께서 천 목사님 가정을 많이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저도 왜 이런 글을 올리는지 잘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 힘~내세요.!!!. 도전해 보시길...
주안에서 전심전력
그후 아편 전쟁으로 말미엄아 중국의 꿈이 무너지자, 선교회는 그를 서인도 제도로 보낼 계획을 세웠으나, 훗날 그의 장인이 될 아프리카의 베테랑 선교사인 로버트 모펫을 만남으로, 1840년 12월 영국을 떠나 13주 후인 1841년 3월 케이프에 도착하게 됨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모팻 부부가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쿠루만을 중심으로 2년 반을 견습선교사로 있으면서, 그 중 무려 1년 이상을 탐험과 여행에 시간을 투자하였다. 1843년 그가 제2의 쿠루만을 꿈꾸며 나아간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숲이 우거진 마보스타(Mabosta) 지역으로서 쿠루만에서 북쪽으로 300Km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이 그에게 있어서는 아프리카 제1의 고향이자 사자와의 싸움에서 왼쪽 어깨에 큰 부상을 당하기도 한 곳이다. 사고를 당한 3개월 후 그는 쿠루만으로 가서 모팻의 장녀 메리(Mary)에게 구혼을 하였고, 1845년 1월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후 메리 리빙스턴(Mary Livingstone, 1821-1862)은 남편과 함께 사역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여자인 메리는 매우 힘든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둘째 아들을 해산한 후 바로(1847년) 남편은 세 번째 정착지를 찾아 나서게 됨으로 함께 7년이나 반유목민의 생활(a semi-nomadic life)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1850년에는 네 번째 아이를 낳자마자 메리는 중풍으로 투병생활을 하게 되고, 결국 아이는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51년 또 다시 그의 가족을 이끌고 탐험 길에 나섰다. 이해 9월 또 다시 메리는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리빙스턴은 그 이듬해(1852년 3월) 그의 아내 메리를 영국으로 돌려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남편과 헤어진 5년 동안의 생활은 오히려 더 큰 고통과 고난, 빈곤의 삶 그 자체였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1차 휴가 기간을 영국에서 보낸 후인 1862년 4월 남편의 품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리빙스턴의 대륙 횡단은 그의 가족들을 케이프타운에서 전송한 후 북쪽으로 돌아가 쿠루만에 잠시 머문 후, 아프리카 중앙에서 탐험을 시작하여 잠베지강(Zambezi River)을 따라 북서쪽 해안 루안다(Luanda) 해안에 이르는 코스였다. 그는 이 기간동안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잊지 않았으며, 성경 교육을 위하여 그림과 매직 랜턴(Magic Lantern, a slide projector)을 이용하였다. 그는 어떤 배의 선장의 호의로 영국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행한 마콜롤로 부족을 고향까지 데려다 주기 위하여 또 다시 동부로 길을 재촉하게 된다. 빅토리아 폭포는 바로 이때에 발견된 것이다.
1856년 영국 방문을 통하여 국가적인 영웅으로 대접을 받은 그는 1858년 아프리카로 돌아가기까지 강연과 저술(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 새로운 선교회 설립을 위하여 힘썼으며, 아프리카를 구하기 위한 상업과 기독교 (Commerce and Christianity)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864년 다시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그는 1865년 나일강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한 그의 세 번째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탐험을 시작하였다. 영양부족(malnutrition), 열병(fever), 빈혈(bleeding hemorrhoids) 등과 싸우며 나아간 그는 비록 나일강의 근원은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아프리카인들은 점점 그와 친숙해지기 시작하였다.
리빙스턴의 사망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방문한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의 편집장 헨리 스탠리(Henry Stanley)의 출현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스탠리가 떠난 1년 후인1873년 5월 1일 그는 평소 그가 하던 대로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이 노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심장을 꺼내어 그곳 므푼드(Mpund) 나무 아래 묻고, 시체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에 말려 미이라로 만든 다음 2,400Km가 넘는 해안까지 운반하여 영국으로 돌려 보냈다.
그의 시신은 많은 고관대작과 저명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국장으로 거행되어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안장되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자식들, 먼저 사위를 보내어야 하는 78세의 모팻에게는 어느 누구보다도 큰 슬픔의 날이었다.
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하여 리빙스톤과 그의 장인 모팻은 그 길을 열어 놓았으며,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 길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