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여섯 번째 이야기 - 우리는 당신이 토요일에 오지 않으리라 믿었오

미로슬라브 키쉬(Dr. Miroslav Kis)박사는 앤드루스 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신학과장으로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다. 그가 기독교 윤리 시간에 들려준 다음의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회상하며 강의를 멈추고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권정행

미로슬라브 키쉬는 11명의 형제 자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열한명의 아이들을 남겨두고 전쟁 중에 살해당했다. 미로슬라브는 가난하게 자랐다. 네 살 많은 형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데 형은 오전 반이고 그는 오후 반이었다. 형이 학교 갔다와 옷을 벗어놓으면, 미로슬라브는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형에게는 옷이 항상 작았고 그에게는 너무 컸다. 음식은 하루 한끼를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음식이 모자라는 것은 큰형이 숨어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나오기만 하면 나치의 독일 군인이 되든지 아니면 공산당의 군인이 되든지 아니면 되든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둘 다 그는 선택할 수 없었다.

1947년 전쟁은 끝나고 가난한 시절, 미국에서 유고슬라비아에 식품을 공급했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주는 식품이 공급되는 날이면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없으면 굶어야 했다. 음식은 밀가루, 옥수수가루 등등이었다. 금요일 날 광고를 알리기 위하여 북소리가 들렸다.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식량 배급이 있겠다는 광고였다. 내일 아침 아홉 시면 안식일 학교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어머니께서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 식량 배급을 받으러 나가면 안식일을 범하고, 받으러 나가지 않으면 다음 식량 배급을 받을 때까지 계속 굶어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판단을 아들들의 자유 의사에 맡기셨다. 우리들은 기도하기 위해 각자 흩어졌다. 기도를 마친 후 우리 가족은 무기명 투표를 했다. 투표 용지를 펼치는 어머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투표의 결과는 만장일치였다. 안식일을 지키는 대신 다음 배급 때까지 굶기를 각오한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교회에 갔을 때, 교회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장로님도 집사님도... 3년밖에 교육을 받지 못한 어머니는 더듬거리며 예언의 신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안식일 학교와 설교를 대신하셨. 예배가 마치자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그들이 말하기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는 것을 예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안식이레 밀 이삭은 땄지만 예배는 빠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로슬라브의 식구들에게는 음식을 나누어주지 말자고 결의했다. 그 안식일은 참으로 외롭고 쓸쓸한 날이었다. 식구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두 시, 갑자기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15Km 떨어진 곳에 사는 신자였다. 그의 질문은 무엇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 당신이 알고 있을 것이라" 고 했다. 그는 이야기했다. 밤에 잠을 자는데 꿈 속에서 누가 나타나 미로슬라브의 집을 찾아가 도와주라고 했다고, 그는 일어나 잠든 아내를 깨웠다. 혹시 그런 소리 듣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아내는 돌아누우면 그냥 꿈이라고 했다. 다시 잠들자 또 다시 똑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다시 아내를 깨우자 가려면 당신이나 가고 다시는 깨우지 말라고 하였다. 돌아눕는 아내는 말하기를 " 그러나 갈 때에는 빈손으로 가지 말라" 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의 마차에서 감자 두자루, 기름 50리터, 밀가루 200Kg, 닭10마리, 새끼 낳은 지 일 년 된 젖 짜는 암소 한 마리를 함께 끌고 왔다. 항상 기도 드리는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시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는 시편 34:05절의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공산당 간부는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당신이 토요일 날 양식 배급을 받으러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오"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