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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 아침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일곱 번째 이야기 - 스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지킬 것인가?

챈들러의 선택과 확신

글렌 맥 냇-볼'티모어 선'지의 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처음에 1996년 3월 31일자 '볼티모어 선'지에 실렸다. 애드벤티스트 리뷰지가 1996년 7월 18일자에 그대로 옮긴 것을 번역 요약했다.

5년전 재니스 챈들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꺾기보다는 유명한 클래식 성악가가 될 기회를 포기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오늘 노래할 이유가 있는가?

메이어호프 심포니 홀을 가득 채운 그 노래는 대가의 음성같을 뿐아니라 영적인 존재가 소리를 통해 뚜렷이 임하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사라질 듯한 고음, 빛나는 중간음역, 레온티느 프리스의 젊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매끄러운 저음.
그것은 지난 해 11월 볼티모어 코랄 아트 소사이어티 30주년 기념으로 열린 화려한 콘서트에서 가장 멋진 순간 중 하나였다. 메릴랜드 출신의 30세의 무명 성악가 재니스 챈들러는 즉각적인 반향을 이끌었다.
청중들은 일어서려던 몸을 다시 앉히고 날개를 달고 솟아오르는 듯한 찬란한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왜 지금까지 그녀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까? 이 여인은 어디에 숨어있었는가? 볼티모어 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미지램 야르두미안은 이렇게 말한다. "재니스는 돈보다 자신의 종교를 우선으로 여깁니다. 그 다음에 음악이지요. 물론 그런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챈들러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교인이다. 그 말은 안식일에 종교음악 외에 오페라 같은 세속음악을 노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신의 활동에 그런 제한을 수용하는 전문 음악가들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재니스는 거의 5년전 자신의 종교에 반하는 행위를 하기보다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녀가 거절한 것은 빠른 시일 안에 얻을 수 있었던 명예와 돈이었다. 이 모든 것을 그녀는 1991년 인디아나 대학의 정규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얻을 뻔하였다.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그녀가 한 세대의 가슴에 새겨질 성악가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녀의 재능의 근원과 인도하는 원칙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잊지 않았던 챈들러는 빛나는 무대의 문지방을 넘기전 다시 균형을 잡는다.
"이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돈이 그것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을 첫째로 삼은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분은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삐꺽거림
챈들러가 인디아나아에 있을 때 그녀의 선생님 중 하나가 그녀의 이름을 룻 지임스키와 알랜 그린에게 흘렸다. 그들은 캐쓸린 배틀과 필라시도 도밍고 같은 수퍼스타들로 대표되는  콜럼비아 예술 매니저먼트사의 대리인들이었다.
1991년 인디아나에서 졸업장을 받기 직전 그녀는 뉴욕의 앨리스 툴리 홀에서 모짜르트의 C단조 미사곡을 연주해 솔로 성악가로 등록하였다. 항상 재능있는 신인을 찾아다녔던 콜럼비아사의 스카우터들은 그녀의 노래를 좋아했고 챈들러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그것은 유명한 교향악단과 오페라단들과 함께 세계를 누비는 즐거움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대다수는 성악가들은 이런 기회를 꿈꾼다. 그런 일이 대학도 아직 졸업하지 않은 그녀 무릎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 때를 돌아보며 챈들러는 안식일에 많은 연주를 해야 할 것으로 인해 고민했다고 말한다. 다행히 첫 연주에서는 문제가 노출되지 않았다. 그녀는 미네소타 교향악단과 헨델의 메시아를 잘 불렀다.
다음 계약은 비발디 돈 칼로스의 천상의 소리 부분을 워싱턴 오페라단과 연주하는 일이었다. 연주 중 한 부분이 금요일밤 시간이었다. 오페라 공연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일정이 정확히 맞아야 했다. 그녀는 콜럼비아사의 대리인들에게 그 문제를 설명하는 일을 미루었다. 그녀는 뒤에 스스로 설 날을 기다리며 먼저 업적을 쌓기를 원했다. "저는 계속 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타협하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그 뒤 그녀는 평생의 종교적 의무를 위반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꼈다. "저는 편치 않았고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제 삶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식일에 일하기 원치 않는다고 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원래 목요일에 잡혀있던 필라델피아 공연의 리허설 일정이 금요일로 바뀌었다. 그녀가 필라델피아에 가서 금요일 리허설을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들의 말은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뒤에 잡혀있었던 모든 계약을 대리인들은 취소해 버렸다. 챈들러는 콜럼비아사의 홍보전략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 회사는 오페라 무대를 통해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하였고-돈과 함께- 좋은 평판의 성취는 곧 고가의 계약을 의미했다.
챈들러의 종교적 관점과 연예계의 흥행요구 사이의 갈등은 곧 충돌한 상황이었다. 1992년 초 그녀는 대리인들에게 자신의 종교적 신조 때문에 금요일 밤과 토요일에 세속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고 숨김없이 말했다. 대리인들은 그녀를 등록명부에서 빼버렸다. 챈들러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수고했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멋진 미래의 약속이 그녀의 눈앞에서 증발되는 듯했다.
"처음에 나는 매우 낙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근본을 무시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근본을 인정할 때 나는 더 좋은 예술가이자 더 나은 인간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재니스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람들이 있다. 음악사업은 사업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교리가 아닌 시장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챈들러가 안식일에 무료로 노래한다던지 수입금을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재니스 챈들러가 커온 가정과 교회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엄격한 절제
챈들러는 1965년 12월 28일, 프린스 조오지 카운티의 브랜뒤윈에서 찰스 챈들러와 그의 아내 마리 사이에서 막내이자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교사였고 아버지는 복직상담원으로 일한다.
챈들러 장로가족은 1956년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 입교했다. 남편은 침례교, 아내는 감리교를 믿었지만 이웃여자의 전도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그 교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교회는 교인들에게 엄격한 절제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 안식일을 지키고, 침례를 요구한다. 현재 그 교회는 전세계적인 조직체로 약 9백만 명의 교인들이 있으며 미국에는 백만명 정도가 있다. 성경이 믿음의 무오한 규칙임을 믿으며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이고 재림이후 천년기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개신교 단체이다.
챈들러 가족은 워싱턴에 있는 듀퐁 파크 재림교회에서 아이들을 양육했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회학교를 다니게 했다. 또 그녀는 알라바마에 있는 재림교회 대학인 오크우드 대학에 등록했다. 이런 환경에서 음악은 재니스 챈들러가 자기를 표현하는 출구였다. 그녀는 12살 때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하기 시작했고 곧 솔로로 지명되었다.
그 때부터 챈들러는 돋보였다. "재니스는 아주 특별했지요. 조숙했고 공격적이고 별로 부끄러워 하지 않았지요"라고 교회 합창단을 지휘했던 에드워드 잭슨은 말한다. "그녀는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고 여성 삼중창의 단원이었습니다. 재니스는 중간파트를 노래했습니다. 그 모임은 복음성가, 영가, 찬미가를 연주했습니다. 그녀는 진학한 다음에도 삼중창의 단원으로 노래했습니다."
챈들러 부부는 딸이 음악에 친숙한 것을 곧 알았다. 한번 공식석상에서 딸이 노래하는 것을 들은 어머니는 특별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음악보다 공부가 먼저였다. 아버지도 그녀의 음악적 재질에 그리 관심이 없었지만 오크우드 대학에서 딸이 연주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음악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딸의 결정을 지지했으며 그 일에서 그녀의 종교적 원칙을 양보하지 말하고 권한다. "재니스는 그녀의 특별한 재능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요구와 배치되는 길로 가야한다면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재니스의 부활은 아주 작게 시작되었다. 1993년 봄 워싱턴 코랄 아트 소사이어티의 지휘자인 스크리브너는 대학에서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그는 챈들러가 집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들어보고는 자신이 오르간 연주자로 있던 알빈스 감독교회에서 오디션 시간을 정하고 여러 곡들을 들었다. "아주 압도적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그녀에게 했습니다."
발티모어 코랄 아트 소사이어티의 전 지휘자였던 스크리브너 씨를 통해 재니스는 현재의 지휘자는 탐 홀을 만났다. 곧 그녀는 두 그룹에서 규칙적으로 공연하였다.
지난해 챈들러는 하로린 블랙월이 몸이 아파 연주를 취소했을 때 야르두미안의 부름을 받고 로버트 쇼우와 함께 연주하게 되었다. 쇼우는 이 뜻밖의 만남 이후 그녀와 다음 시즌에 있을 몇 번의 연주회 계약을 하였다. 그의 지도아래 그녀는 애틀랜타와 미네소타 교향악단과 연주하게 되었다. 야르두미안이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그녀를 소프라노로 택한 로렌스 바써만은 안식일에 세속음악을 노래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음악계에서 그녀가 부상하는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에게는 순수한 소리와 학습으로 되지 않는 음악에 대한 접근방식이 있습니다. 그녀는 종교음악에 맞는 영적인 친화력이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교향악단들이 그녀를 다시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챈들러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지금 손짓하는 성공을 반기는 반면,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따라온 종교적인 길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는데는 어떤 변명도 없다. 나는 내 자신과 내 음악에 진실 되고자 합니다. 그것은 명성도, 돈도 아닙니다. 만일 내가 공평한 사람이고 선량한 음악가라는 평판을 얻을 수 있다면 내 목표를 이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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