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lasting-gospels.gif
letter-text.gif
line.gif
guide_img.gif

11월 11일 화요일 - 부활의 능력

guide_img.gif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가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5~8).

바울은 부활의 주제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단일 주제보다도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해 폭넓게 논했습니다. 58절로 된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그의 걸작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만의 의견이 아닙니다. 신약 전체에서 ‘그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이 핵심적 사실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존재는 살아 있는 동안 좋은 말을 남기고 현재는 죽어서 아무 힘도 못 쓰는 ‘훌륭한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철학 학파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기독교의 토대는 마련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모든 신자의 삶에 힘이 되신다고 믿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추종자인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가 태동한 헬라 문화권에서는 육체의 부활과 육체의 가치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기자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심지어 물고기도 잡수시는 실제 육신으로 부활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것입니다. 그분은 환영, 유령, 몸이 없는 영이 아니라 수백 명 앞에 나타난 주 예수님이셨습니다. 의심 많은 사람들도 그분을 목격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예수님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이 꾸며 낸 미신으로 여겼습니다. 이 같은 ‘신화’에 대한 그의 대응책은 박해로 맞서는 것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실제로 그는 박해에 가담했습니다.
이후 부활은 그에게 삶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과 그분의 능력에 삶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한껏 사용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삶도 소망과 에너지와 목적으로 채우고자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기느냐 마느냐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제 인생의 방향을 찾고 힘을 얻도록 오늘 그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