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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금요일 - 또 두려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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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 33).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아직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성경절에는 ‘두려움’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시인’하지도 ‘인정’하지도 주님을 ‘편들지’도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밑바닥에 암시되어 있는 두려움의 실체를 <메시지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여론에 맞서 내 편을 들어라. 그러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희 편을 들겠다. 너희가 겁이 나서 달아난다면 내가 너희를 감싸 줄 것 같으냐?”
예수께서는 세 번씩이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셨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제 목숨을 빼앗거나 신체적 상해를 끼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저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다면 사람들은 저를 놀리거나 200년 전에나 태어났어야 할 순진한 시골뜨기로 취급할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치 뼛속부터 배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우리 자아에 관한 두려움을 예수께서 처리하시도록 맡겨 버린다면 그 상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편드는 사람은 하늘에서 인정받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소식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설령 그분을 부인했더라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다시 받든다면 은혜로우신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 편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어이없이 나자빠진 베드로도 이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이 생겨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사실로 받아들일 만큼 강한 어조였습니다.
다행히 베드로는 회개했고 회복되었습니다. 이후 평생토록 그는 주님을 시인했습니다(그 역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고 그런 삶을 산다면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실 것입니다. 나쁜 소식도 있습니다. 우리가 고집스럽게 주님을 부인한다면 결국 스스로를 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중 누가 더 두려운가?” 자신에게 던져야 할 유일한 질문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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