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번 성경 통독한 이야기, 읽는 것은 내 삶의 방식


나는 순진한 농촌에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초등학교조차 다니기 어려웠다. 월사금(등록금)조차 내지 못하여 번번이 학교에서 쫓겨 오기가 일쑤였고, 그때마다 집으로 바로 오지 못하고 동산이나 묘지에서 시간을 보낸 뒤 돌아오곤 했다. 가정 사정을 뻔히 알고 있던 터라 월사금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했고, 또 한편으로는 그 말을 했다가 학교 그만 다니라고 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었다.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던 수업시간에 집중하기 위하여 나는 교과서를 읽고 또 읽어서 내용을 머릿속에 완전히 암기하였다. 그런식으로 학교를 오가니 지금도 그때의 교과서 내용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당시 2년을 일제 치하에서 배웠는데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를 열면 동산에 둥글게 떠오르는 그림과 함께 ‘아까이, 아까이… 히노민주도 하다. 밧사이, 밧사이…’로 시작되었다. 1990년 일본에 갔을 때 그 당시 외웠던 교과서 이야기를 했더니 일본교회 지도자들이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그때부터 읽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그러한 삶의 방식은 계속되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집에서 19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나는 매일 왕복 38Km를 다녀야했는데, 학교 오고 가는 시간이 내 공부 시간이었고 이 시간에 전 과목 교과서를 읽고 또 읽어 거의 다 암기하다시피 하였다. 고등학교, 대학시절에도 참고서를 살 수 없어서 책을 빌려다가 정독을 하며 메모를 하는 것이 내 공부 방식이었다. 거의 책을 빌려다 보았기 때문에 대학시절 내가 소유한 책은 성경 찬미를 합해도 열권이 안 되었다. 누가 봐도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삼육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대전 중앙교회에 부름을 받은 후 결혼을 했다. 많은 책을 가지고 시집을 온 아내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책 부자가 되었으나, 나는 이미 상당히 많은 책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나의 읽는 습관 때문이었다.



내가 재림교인이 된 것도, 목사가 된 것도 읽는 습관 때문이다. 공군에 입대해서 지휘관들의 자녀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공군 도서관에서 정로의 계단이란 책을 보고 감동을 받아 60번을 정독한 것이 재림교인이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제대한 후 감리교회 다니던 이종사촌 누이에게 옛날 말로 기록된 신약 성경을 얻어 그 책을 읽고 또 읽어 이십년 교회 다닌 이종사촌들 이상의 성경 지식을 얻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가을 추수하고 수매가 끝난 뒤 관주 성경을 한권 사 주셨다. 그런데 이 성경이 나의 온 생애의 보물창고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최고의 선물이 된 것이다. 1962, 처음으로 3개월에 걸쳐 신구약성경을 정독했다. 물론 신약은 이미 수도 없이 읽었으나 구약은 처음 읽었는데 너무도 깊은 샘이었다. 그 해 4번 정독을 하고 난 후 신학교에 가야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빈손으로 상경하여 공부하게 되었고 나는 드디어 목사가 되었다.



1962
년부터 1994년까지 매년 3회에서 5회정도 성경을 통독 106독을 달성하였는데, 성경 읽는 것은 더욱 입맛이 당겨져서 읽고 또 읽어도 배가 고팠다. 1995년부터 200독을 목표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성경과 예언의 신을 집중하여 읽기 위하여 한때 처남이 운영하는 속독 학원에서 수강도 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속독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욱 정독하고 숙독하였다. 새벽 3 30분에 일어나서 매일 성경 두 시간, 예언의 신 한 시간을 열독하였다. 이런 습관을 계속하는 가운데 한 달에 한 번, 늦어도 두 달에 한 번씩 통독을 하여 2007년도에 200번 통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습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무궁무진한 보물창고를 내 어찌 방치하겠는가!



내 평생 성경과 함께하는 생애에 위기도 여러 번 있었다. 그 첫째가 영어 공부의 필요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목회 초년에 6개월 영어공부를 병행해 보니 그것이 단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이때까지 일관되게 성경과 함께하던 습관에 큰 타격이 되어 미련 없이 포기하였다. 연합회 부장이 된 후 지회로부터 삼육 영어 학원에서 어학연수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레벨 3, 4까지 수강하였으나, 더 이상 계속하면 성경 습관이 약화되고 평생 신념이 흔들릴 것 같아, 장차 얻을 수 있는 특권까지 맘속으로 접고 포기하였다. 두 번째 위기는 유학 시절에 왔다. 연합회 부장의 임기가 끝날 무렵, 서울에서 지회연례회의가 끝났는데 갑자기 유학시험(미시간 테스트)을 서울 여대에 가서 보라는 것이다. 준비기간도 없이 바로 다음날 시험을 보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단 번에 합격했다. 따라서 필리핀에 있는 PUC(AIIAS 전신) 대학원에서 수학할 특권을 얻게 되었고, 매년 여름휴가 기간 동안 취득한 학점이 인정되어 대학원을 최 단기인 한 학기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6개월 기간이었지만 헬라어 자습과 여러 독서과제로 성경을 읽는 내 생활 방식에 큰 흔들림이 있었다. 세 번째 위기는 박사학위 권유를 받은 것이다. 1992년 필리핀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AIIAS에 박사 학위 취득 권유를 받았다. 나는 선교사로서의 사명(마닐라 교회, 네가스피 교회, 세부교회, 다구판교회)과 학위를 취득하는 일을 겸하여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서 거절하였다. 두 가지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분명 한 가지는 소홀하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나의 결심을 굳게 한 것은 지난 대학원 시절에 공부를 하면서 도움도 되었지만 회의(懷疑)가 앞선 것이 생각 난 것이다. 공부가 목회사업에 도움도 되었지만, 말씀을 읽으면서 얻는 보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읽는 시간 못지않게 생각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하루에 적어도 일곱 시간 이상 시간을 내어 성경과 예언의 신, 또 여러 서적들을 읽으면서 중요한 주제들을 메모하고 제목화 하여 글을 쓰게 되었는데 2003 8월 말에 은퇴한 후 23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내가 받은 삼육교육은 삼육대학에 편입해 공부한 것이 전부이지만 평생 읽는 습관이 모든 부족을 다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고백 할 수밖에 없다. 성경과 함께 한 나의 생애는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그 보화가 너무도 값지고 무궁무진하여 그 말씀이 나를 붙들어 이끌어 온 결과이다. 74세인 지금까지도 그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고 아니 생이 다하는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권만복_은퇴목사
서중한합회 계간회보 교회사랑 35호/봄




 

Blessing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