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추위가 느껴졌던, 1998 겨울,
한국은 IMF 인해, 우리나라 전체가 경기 불황을 겪고 있을때였다. 하나님께서 해에 우리 가족을 일본으로 인도하셨다.

동경에서 , 시간 거리에 있는 마에바시(군마껭)라는 곳에 다행히 ‘아까기야마’라는 건강식품점을 운영하는 재림교회가 있었다. 나이든 서너명의 교인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젊은사람들은 겨우 호주에서 선교사 가족과, 우리 가족뿐이다.

초창기 일본 재림교회에는 젊은이들이 많았는데, 예절을 중요시하는 민족성과 재림교인의 엄격함이 합쳐져서 젊은이들이 떠나버렸다고 한다. 일본교회 분위기는 한국재림교회 보다 밝지 않고 어둡다.

우리 가족이 일본에  적응하기도 전에, 남편의 미국연수가 결정되어, 우리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한해 두번씩이나 국제이사를 셈이다.
일본을 떠나기 , 한인교회 주소를 얻어, 미국에 도착하자 마자, 군데 전화를 걸어보았다.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2시간 거리에 한인교회가 있었다.  
미국이 넓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을 한다. 나는 목사님께  이사예배를 부탁드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남편은 장로교인이었고,  나와 종교적인 문제로 많은 갈등을 겪고 있을때이다.

멀리서 목사님이 이사예배를 위해 오셨다.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은 안식교 목사님이 오셨다는 말에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국에서도  우리 부부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6년간 교회를 따로 다녔다. 남편은 재림교회를 이단이라고 생각하였고, 그에게 재림교회란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한국에서 교인들과 목사님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었으나 짙은 편견때문에 재림교인들에게는 인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 남편의 손님이 방문하는 날이면, 남편은 집에 있는 재림교회 서적이나 잡지들을 모조리 숨기거나 치우는 일부터 한다.

나와 남편은 어렸을때부터 같은 장로교인이었다. 우리 아이가 되던 , 나는 재림교인이 되었고, 우리 부부는 신앙문제로 많은 갈등을 겪었다. 우리 아이는 한국에서 일학년을 마쳤는데, 안식일에 학교를 보내지 않는 문제로, 남편은 나에게 마음문까지 닫아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가까운 곳에 재림교회와 교인이 없다는 것은 남편에게는 기쁜소식이요, 나에게는 위기였다. 지금까지 힘들게 버터온 신앙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이 많았다. 우리 가까운 곳에 한인장로교회가 있었다.

남편은 내가 다시 장로교인이 되기를 바랬고, 우리 부부의 소원 또한 가족이 다같이 교회를 다니는 것이었다. 남편은 가까운 곳에 미국 재림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나에게 오래동안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고민끝에 남편에게 내가 일요일에 교회를 함께 가는 대신, 안식일에 나와 함께 재림교회를 가자고 제안을 하였다. 남편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함께 일요일과 안식일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였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청해서라도 남편에게 재림신앙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 재림교회 사정도 마찬가지로, 남편과 상대할 만한 젊은 사람이 없었다.  손을 내밀어도 낯선 외국인의 손을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재림교회에 대해서 비판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교회에 노인들만 있고,  교회 분위기는 율법주의처럼 어둡고, 딱딱하다며 빈정거렸다.
나는 미국교회 예배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가족들을 모아놓고 다시 안식일 예배를 한국식으로 드렸다. 남편은 항상 멀리 떨어진 소파에서 구경꾼으로 앉아있다.  

나는 교회와 교인이 없는 곳에서 자신이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아침에는 설교테입과 찬양으로, 저녁에는 설교테입과 예언의 신을 들려주었다.
한국에서 요한계시록을 가르친다는 장로님을  초정해 한달동안 예언을 공부하고,  
남편을 위해서 이것 저것 시도해 보았다. 이것이 될련지, 저것이 될련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위해 나를 먼저 가족 선교사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내가 해야 사명은 분명했다. 교회와 교인이 없는 곳에서 나는 외롭고, 고독한 가운데 재림신앙인으로 살아왔다. 나를 찾아와 주는 교인이 없었으며, 신앙을 돕는 사람도 없었다.  

주변엔 언제나 장로교인들로 가득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시 장로교인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과 섞이긴하였지만, 신앙의 원칙과는 섞이지 않았다. 물론 어렸을때부터 다니던, 정든교회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로교회를 다니면 아무런 장벽도 없고, 어려움도 겪을 필요가 없었지만, 마음은 항상 재림교회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비록 많은 어려움과 장벽과 편견이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나는 재림교회를 마지막 노아의 기별, 소돔과 고모라의 기별, 예루살렘의 기별처럼 여기고 있었다.

한인교회가 그리울 때면, 나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남편은 나를 위해 일년에 두번씩 멀리있는 한인교회를 주었다. 당시에 우리 막내 아이가 겨우 살이었기 때문에 나는 장거리 운전도 하지 못했다.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린적도 많고, 우울증도 걸린적도 있다.

나는 남편을 따라 일요일에 교회를 다니면서  어린이부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였다.
남편은 가족과 함께 열심히 활동하는 아내의 모습에 기뻐하였다. 나는 교회가 없는 곳에 자신이 교회가 되어야 했기에, 재림교회의 건강원칙과  신앙의 모든 원칙을 그대로 가정에서 행하였다.

얼만큼의 세월이 흐르자, 남편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남편은 한인 재림교회를 6개월에 한번씩   주다가, 나중에는 3개월에 한번씩, 한달에 한번씩, 이주에 한번씩, 점점 재림교회 나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어느정도 남편에게  재림교회가 더이상 어색하지 않는 틈을 타서, 나는 목사님께 남편을 위해  침례공부를 부탁드렸다. 목사님께서는 남편을 위해 일주일동안 먼거리에서 직접 우리집을 방문하여 남편에게 침례공부와 성경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 온지 7년만에 남편이 재림교인이 되었다. 횟수로 14년이 걸린셈이다.  
남편의 신앙을 위해서 나는 장거리 교인이 되었다. 미국에 15 살면서 멀게는 3년동안 왕복 여덟시간 걸리는 교회를 다녔으며, 왕복 시간, 다섯시간 운전해서 4년간 교회를 다닌적도 있다.

가장 가까운 거리가 2년전에 인디아나로 이사온 교회이다. 왕복 시간 걸린다. 장거리 교인이었을때 나는 교인들과 목사님을 우리 집에 초대해 그들과 자주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다들 바빠서 식사초대를 해도 멀다고 오지 않는다.

이곳이 멀다면 천국은 얼마나 멀까. 멀리서 오는 평범한 교인을 교회는 그저 방문자라고만 취급하였다.아무리 년씩, 시간씩 운전해서 교회를 와도 교회는 우리를 객이나 초신자라고 생각하였다. 덕분에 초신자 반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서 멀다는 이유로 모든 행사에서 제외시켜, 좋은 행사를 놓친적이 많다.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서 미리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해도 장거리 교인을 위해서 연락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장거리 교인은 교인도 아닌가보다.

장거리 교인으로 넘게 교회를 다녔지만, 누구 사람, 우리 가족을 식사초대 사람이 없다.  우리 남편이 의사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대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거리 교인에게는 순서도 맡기지 않는다.

나는 이사를 갈때쯤이면 내가 교회에 순서를 부탁해서 시간을 쓰곤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진작에 그런 좋은 경험들을 우리 교회에 나눠주었으면 하고 아쉬워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쩌다 교회 행사가 늦어지거나 교회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거리상 하룻 밤을 자야 때가 있다.  

장거리 교인이라 알고, 친한 사람도 없어 마땅히 재워줄 사람도 없다.
교인들에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부탁을 하면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한번 신세진 곳은 부탁하기가 민망하다. 그래서 매번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되고, 어느땐  잘곳이 없어서 호텔에서 때도 있다. 내가 자주  하룻밤을 신세진 집은 가난한 집사님 댁이다.

나는 집의 소파 위에서 하룻 밤을 보낼때가 많다.  교인들의 좋은 집과 텅빈 방이 많아도, 빈방 그대로 망정, 나그네를 위해 선뜻 방을 하나 교인은 많지 않았다.  
나는 마리아를 자주 생각해 본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낳기 위해  지금 진통을 겪고 있다.

요셉은 진통을 겪고 있는 마리아를 부축해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면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애원을 한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위해 누구 한사람도 방을 주지 않는다.  
누추한 자를 위해서 줄수 있는 방은 없다. 아픈배를 쥐며 여러시간 돌아다닌 끝에, 겨우 얻은 방이 가축들이 사는 누추한 마굿간이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화려하게 크리스마스 추리를 장식한 집들이 미국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모습이다.  저들은 누구를 위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것일까. 베들레헴의 아기를 위한 것일까,나그네를 위한 것일까. 오늘날 크리스마스 장식은  아기 예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아기 예수는 하룻밤 묵을 방이 없이 헤메고 있다. 지금도 마리아는 아픈배를 쥐며 하룻밤 방을 찾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아였고 나그네 되었을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때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때에와 옥에 갇혔을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25:42-43).  

나는 재림교인들의 인색함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남편과 아이들의 불평도 많았다.
멀리서 와도, 누구 한사람 관심가져주거나 인정해 주고, 알아 주는 사람도 없는데, 뭐하러 비싼 기름값 주면서 이런 교회를 다녀야 하냐고 핏잔을 받을 때가 많다.

그러나 나는 그것마저 믿음이라 생각한다. 찬미가운데 “환난과 핍박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한량없도다 성도 신앙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노래 가사를 마음에 세긴다. 우리가족은 새벽부터 교회를 가기 위해서 어린자식들에게 아침밥도 굶어야 하였다.

미국에서의 15 장거리 교인으로서 어려운 일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날에 있게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현재 있는 문제와 어려움을 대면한다. 지금 당하고 있는 것들이 때보다는 훨씬 가볍다고 생각한다.

하늘 집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일할 특별한 자리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이사를 때마다 하나님께 교회와 교인이 있는 곳으로 가게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사 가는 곳마다 교회와 교인이 없는 곳으로 나를 보내셨다.

덕분에 나는 많은 일반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게 되었다. 장거리 교인으로서 바깥에서 보이는 재림교인의 모습도 있었다. 개인 봉사는 일반교회를 따라갈 없다.  
우리 교인들은 같은 재림교인들에게 너무 인색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문화때문에 사이를 휘집고 들어가기란 어렵다.

교회가 없는 곳에서 홀로 외로운 재림신앙을 지키면서 신앙은 하나님과 친밀 해졌다나는 외로울 때마다 밧모섬에 유배당한 사도 요한을 명상한다. 보살핌을 받아야 백발의 노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한 바다와 귀에 들리는 소리는 철썩이는 파도뿐이다.  

적막하고, 고요하고 외로운 곳에서 홀로 성전을 향하여, 안식일 마다 지팡이를 짚고 산봉오리에 올라가야 멀리 눈에 아른 거리고 있는 일곱교회가 보인다. 요한의 마음은 벌써 일곱교회에 있다.  안식일에 누가 왔을까.. 지금 어떻게 예배하고 있을까..

서로 어떤 교제를 나누고 있을까..
안식일 마다 요한의 마음이 교회에 있었던 것처럼, 마음도 그랬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만날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있는 곳에 찾아오셨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가정성소에서 시작된 것처럼, 나는 매일 가정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방에는 하나님과 만나는 성소가 따로 정해져 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소에 들어간다.

사단의 지배가 계속되는 나에게는 굴복해야 자아와 극복해야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옷장 구석이 성소이다. 그곳에서 매일 여러 시간 말씀과 예언의 신을 통해서 자아를 비우기를 기도한다.

예언의 신은 기록하기를 “가정은 가족을 위한 성소이고, 골방과 숲은 개인의 예배를 위한 성소”이다. “교회는 회중을 위한 성소”이다. 높거나 낮거나 도시이거나 거칠은 산중 동굴 속이거나 비천한 오두막이거나 광야이거나 간에 성소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복있다”고 말한다.

나는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닌,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복을 받고 싶다. 하나님께서 장거리 교인인 나에게 많은 복을 주셨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글들을 오랫동안 요약하는 습관이 길러지므로 인하여 많은 재능까지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힐링선교에 대한 꿈을 갖게 주셨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시고, 교제하셨듯이, 나는 재림교회가 우리끼리만 어울리는 관계를 떠나서,  사람들과 섞여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장거리 교인이 되게 하셨는지, 이유를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재림교회에서 나눌 없는 것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셨다. 나는 많은 곳에 봉사활동을 하였다. 건강음식으로 이웃을 많이 초대하였다.

지역 양로원에 가서 한국 학생들과 함께 악기 봉사도 하였다. 직장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알선 주고, 글로 선교하며, 개인적인 봉사를 통해서 사람을 만난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을, 옷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옷을, 방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방을 준다. 외롭고 시험받는 자들에게는 다정한 친구가 되어준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재능과 기회를 배우고 행하는 일에 최대한으로 활용할 곱하기 법칙에 따라서 냥쭝을 주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재림성도여러분!
변화무쌍한 인간에게 다른 사람을 돕고, 구원할 있는 기회가 항상 열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허식을 좋아하고 안일을 사랑하는 정신이 이러한 봉사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 놓습니다. 우리의 봉사속에 자아가 지나치게 많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희망을 잃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의 떡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의사도 고칠 없는 영혼이 병든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혜택을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모든 영혼의 운명이 신속히 영원히 결정되려는 시기에 하루가 가고 주일이 가고 한달이 가는 동안, 우리의 일할 시간은 하루씩 한주일씩 또한 한달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통과 궁핍의 시간에 재림성도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보상이 아닌 봉사를 해야 합니다. 봉사에는 완전한 헌신이 있습니다. 생활에 실천되지 않은 진리, 나누어 주지 않은 진리는 생명력과 치유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영생은 그것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가치가 있고, 어떤 희생이라도 즐겨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재림교회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희생하므로 영원한 영광을 얻게될 것인지를 보여줄 차례입니다.  

judy5015@hotmail.com